[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정부의 농산물 수급정책 기조는 최근 생산자들의 역할을 대폭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잡혀 있다. 긴급한 상황에만 정부가 개입하면서 재정부담을 줄이겠다는 심산이다. 지난 22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전망 2020’ 대회에선 이같은 정부 기조가 다시 한 번 뚜렷이 확인됐다.
정부가 주목하고 있는 건 유럽연합(EU)의 생산자조직(Producer Organisation, PO)이다. 이날 발표된 송정환·하석건 박사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EU(구 EC)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정부 중심에서 생산자 중심으로 수급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최근 EU의 수급정책은 PO가 주도하고 각국 정부가 보조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EU가 인정하는 PO는 생산자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법인으로서 회원국 정부가 정하는 최소 취급액 및 조직원 수를 충족해야 한다. 농민들은 품목당 하나의 PO에만 가입할 수 있고 생산한 농산물 전량을 소속 PO에 출하해야 하며 PO는 이를 통합판매한다.
또한 PO는 EU가 제시한 사업목표에 따라 수급조절 역할을 하게 되는데, 3~5년 단위의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시장격리, 생산·출하조절, 일부 재해보험 사업까지 직접 수행하고 있다. 대표성을 인정받은 PO의 결정사항은 해당 권역 내 비조합원 생산자 및 생산자단체들도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PO엔 개별 정부가 아닌 EU 차원에서 사업자금 지원(자부담 1대1 매칭, 취급액의 4.1% 한도)이 이뤄진다. 정부는 심각한 수급불안 시에만 개입하는데, PO를 통한 수급조절 시스템이 자리잡은 뒤로는 수급불안 상황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2010년 이후 농협 중심의 통합마케팅 체제가 도입됐고 공선회 등 기초생산자조직이 정비되고 있지만 PO와 같은 권한이 뒷받침되지 않아 아직까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생산자 자발적 결성체라는 정통성과 자조금법이라는 제도적 기반을 가진 양파·마늘 의무자조금이 최근 맹렬한 기세로 발족을 준비하며 ‘산지 주도형 수급정책’에 도전하고 있다.
정부는 ‘한국형 PO’ 운용에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수급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점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앞길이 명쾌하게 보이진 않는 상황이다. 특히 PO 주도권을 둘러싼 농민-농협 간 알력다툼과 PO를 앞세운 정부 수급책임 축소 등의 문제가 우려되고 있다.
권재한 농식품부 유통소비정책관은 “수급에 정부가 개입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시장자생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며, 의무자조금 및 생산자조직화를 갖춰나가겠다”라며 “농협의 통합마케팅이나 산지 마케팅조직들이 진화하고 있지만 유럽 PO 같은 기능을 담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현재 한국형 PO는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 계속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