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대장’ 꿈꾸던 소년, 농민수당 전도사로

이 사람 ㅣ 전남 장흥 농민 박형대씨

  • 입력 2020.01.19 18:00
  • 기자명 심증식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2018년 10월 어느 날 박형대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한테 연락이 왔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 인터뷰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도올 선생은 지난 대선 때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로 ‘풍요로운 농촌건설’을 주창했다. 농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사라지는 이때 당대의 석학이고 철학자인 도올 선생이 농업을 이야기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부터 도올 선생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인터뷰라니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전남 장흥에서 농사짓는 박형대라는 농민이 어떻게 도올 선생과 연이 닿았을까. 수년 전 <한국농정>에서 도올 선생을 만나려고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박형대 전 위원장과 도올의 연결 지점은 일찍이 독립운동을 하신 그의 증조할아버지 박제현 선생이다. 도올 선생이 10여 년 전 모 방송의 독립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 촬영차 전남 보성에 왔다가 박씨 집안의 독립운동 내력을 찾으면서 인연이 됐다고 한다. 그때를 계기로 그는 도올 선생에게 농업문제에 관한 자문을 해주고 있다.

농민수당 전도사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농민수당의 의미와 가치 등을 전파하고 있는 박형대씨는 “농민수당은 농민들이 지금껏 유지해온 농업·농촌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과 더불어 이를 더욱 증진시키기 위한 농업정책”이라고 강조했다. 한승호 기자
농민수당 전도사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농민수당의 의미와 가치 등을 전파하고 있는 박형대씨는 “농민수당은 농민들이 지금껏 유지해온 농업·농촌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과 더불어 이를 더욱 증진시키기 위한 농업정책”이라고 강조했다. 한승호 기자

‘안 대장’ 꿈꾸며 보낸 유년기

구한말 전남 보성에서 안규홍 선생이 거병한다. 안규홍 선생은 박형대의 증조할아버지 박제현 선생의 먼 집안사람으로, 박제현 선생 집에서 담살이(머슴)를 살았다고 한다. 머슴이 거병해서 나라를 구하는 의병대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주인인 박제현 선생은 그 밑에서 분수관(재정 담당)을 맡았다. 박제현 선생의 애국심과 인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분들을 취재하고자 도올 선생이 박형대 씨 집안을 방문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어릴 때 매일 산에서 놀았는데, 서로 ‘안(안규홍) 대장’이 되려고 했어요. 동네 애들이 모두 그렇게 안 대장이 돼 왜놈들을 무찌르는 꿈을 꾸면서 컸죠.” 박씨 역시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으로 의병 전투가 벌어졌던 동서산 아래서 안 대장을 흠모하며 꿈을 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보성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박씨가 다닌 고등학교는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있는 학교였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전남대 앞에서는 수시로 집회가 있었어요. 집회가 특히 많은 5월에는 최루탄 냄새 때문에 수업을 일찍 끝내 줬어요.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레 대학생들 따라 금남로에 갔어요.”

소년들의 호기심과 정의감 그리고 영웅심이 이들을 5월이면 금남로로 이끌었다. “금남로에 가면 학교 선생님들이 머리띠 메고 눈 밑에 치약을 바르고 계셨어요.” 생활 속에서 데모를 접하고 자연스럽게 익혔던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전남지역의 특징인지 모른다. 박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집회에 참석하다 보니까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어요.” 그가 특별한 계기도 이유도 없이 학생운동을 받아들인 것은 한편으로는 집안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고, 안 대장의 영향, 한국전쟁 때 집안 어른들의 희생 등 선조 때부터 옳은 일에, 약자들을 위한 일에 자연스럽게 앞장서게 된 집안의 가풍이 다방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장흥으로 내려가 농민이 되다

농대를 졸업한 그는 농민운동을 하려고 전남 장흥 관산면에 사는 정우태씨를 농민회에서 소개 받아 찾아 갔다. 정씨는 나중에 민주노동당 전남도의원을 역임했다. “우태 형님 농사를 도우면서 농사짓는 법과 농민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죠.” 박씨는 1년간 농사를 배우며 장흥에서의 삶을 계획했다. 한해 농사를 마치고 독립을 하기로 했다. 직접 농사를 지어야 농촌에 빨리 정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장흥읍으로 이사해서 논밭을 얻어 농사를 시작했다. “말이 읍이지 끄트머리예요. 산골 다랑이 논 얻어서 농사짓기 시작했죠.”

산골 다랑이 25마지기를 얻고, 중고 경운기를 한 대 사서 농사를 시작했다. “모심기 전 4월에 초벌 로터리를 치는데 아침에는 쌀쌀해서 경운기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았어요. 시동을 걸려고 경운기를 한참 돌리니까 나중에는 팔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아프더라고요. 병원에 가서 경운기 시동 걸다 팔이 아파서 왔다고 하니까 의사선생님이 팔을 고칠게 아니라 경운기를 고치라고 할 정도였어요.” 디젤 경운기는 날씨가 추우면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특히 오래되고 낡은 경운기는 추운 날 아침에 시동 걸기가 더 힘들다. “경운기로 아침부터 로터리를 치다보면 오후에는 내가 경운기를 끄는 게 아니라 경운기에 끌려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들었어요.” 낡은 경운기로 30여개가 넘는 다랑이 논을 로터리 치며 장흥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농사지으며 고생 많이 했는데 좋은 분들을 만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박씨는 논농사와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주 농사는 표고농사라고 할 수 있다. “표고 전문가라고 할 신재선이라는 친구한테 표고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도움도 받으면서 표고농사를 했어요.” 농사에 경험이 없는 사람이 주변 도움 없이 농사짓기는 어렵다. “우리 동네에 박로진 어르신이 있어요. 진짜 농민이고 농사기술자예요. 이분한테 농사기술 지도도 참 많이 받았어요. 어려울 때 도움도 받고, 그리고 농민회 지회장인 안영근 형님은 친형처럼 저를 챙겨주셨죠. 이분들 덕분에 제가 여기서 자리 잡고 살게 됐어요.” 정착 과정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박씨는 주변사람들에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땅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땅값이 오르고 결국 농민들에게 그 피해가 가요. 그래서 땅 소유를 권장하지 않아요. 소유를 중심으로 땅을 생각하면 생산수단인 땅의 본질은 사라지고 탐욕이 우선하게 돼 있어요.” 박씨의 땅에 대한 철학이다. 한승호 기자
“땅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땅값이 오르고 결국 농민들에게 그 피해가 가요. 그래서 땅 소유를 권장하지 않아요. 소유를 중심으로 땅을 생각하면 생산수단인 땅의 본질은 사라지고 탐욕이 우선하게 돼 있어요.” 박씨의 땅에 대한 철학이다. 한승호 기자

“땅 욕심내면 안 된다”

20여년 농사를 지어오면서도 그는 땅이 없다. “1998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해서 가장 많이 지었을 때엔 1만4,000평까지 지어 봤어요. 그러데 내 땅은 하나도 없어요. 표고재배하는 땅도 임대죠.” 소유한 땅이라고는 집터와 텃밭 조금 있는 게 전부다. 박씨는 장흥에 내려와 10년간 셋방으로 전전하며 5번 이사한 끝에 밭 한 뙈기를 장만해 집을 지었다. 이때 마련한 밭이 박씨가 소유한 유일한 땅이다.

“땅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땅값이 오르고 결국 농민들에게 그 피해가 가요. 그래서 땅 소유를 권장하지 않아요. 소유를 중심으로 땅을 생각하면 생산수단인 땅의 본질은 사라지고 탐욕이 우선하게 돼 있어요.” 박씨의 땅에 대한 철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은 가장 좋은 축재의 수단이요, 재산증식의 보증수표로 인식돼 있다. 박씨의 땅에 대한 철학은 당연하지만 현실에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이 느껴진다. “농촌에 새로운 사람이 농사지으러 오면 농지를 주는 시스템도 필요하지만, 농촌사회가 법과 제도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박씨는 아직도 농촌에는 따뜻한 농민들의 정서가 있기 때문에 농민들 속에 같이 하면 땅 문제도 쉽게 해결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청년들이 농촌에 와서 농촌마을에 몸과 마음을 푹 담그고 살아가면, 거기서 길이 열려요. 농민들은 따뜻한 인정이 있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살 길을 만들어 주거든요.” 아마도 박씨 자신이 월평마을에서 겪은 일일테다. 농촌에 들어가 성실하게 지내고 농민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마을에서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 농촌이다. 이것이 농촌의 정서, 농민의 인정, 농촌의 문화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고, 대표적인 농업의 공익적 기능이다.

청년 살리는 농업의 공익적 기능

이웃을 살리고 낯선 청년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 공익이 어디 있겠는가. 농촌에 그게 남아 있고 그것에 대해 사회적 보상을 하자는 것이 농업의 공익적 기능에 대한 보상이다,

박씨는 농민수당의 전도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농민수당은 농민이 농사를 지으며 농촌사회를 지키며 만들어 내는 공익적 기능에 대한 보상을 하자는 것이다. “농민수당은 농민들이 요구해서 만들어낸 정책이에요. 제안도 농민들이 했고 내용도 농민들이 채워나갔죠. 처음에는 이름만 있고 내용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걸면서 농민들의 관심이 폭발한 거예요.” 농민수당은 2016년 총선 당시 전농의 농정공약 요구안으로 제시됐고 민중당의 선거공약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런데 2018년 지방선거를 분기점으로 지자체에서 시행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농민수당이 현장에서 정책으로 만들어지면서 내용을 채워야 했죠. 농민운동가들이 답을 만들어 내야 했어요. 그래서 지역에서 다양한 토론과 공부를 하면서 내용을 만들어 간 거죠. 집단지성이라고 하잖아요. 농민들의 의견이 모여 농민수당 내용이 만들어 진거예요.” 농민수당은 사실 그가 제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씨가 전농 정책위원장으로 있을 2016년 당시 전농의 총선 농정공약 요구안으로 농민수당을 제안했다. 박씨는 임기를 마치고 전남으로 내려가 전남지역 농민수당 논의를 주도하면서 내용을 채워갔다. 2018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전국을 다니며 농민수당 관련 각종 토론회와 강연을 했고 농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알려냈다.

“마을 이장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배웠어요. 하나의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죠.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살면서 되로 주고, 말 이상 더 많이 받은 거 같아요. 그래서 항상 겸손하고 정성을 다하며 살려고 노력해요.” 한승호 기자
“마을 이장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배웠어요. 하나의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죠.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살면서 되로 주고, 말 이상 더 많이 받은 거 같아요. 그래서 항상 겸손하고 정성을 다하며 살려고 노력해요.” 한승호 기자

농민수당, 농민이 제안하고 만든 정책

그런데 지금 농민수당제도에 관해 농업의 공익적 기능에 대한 보상이냐, 농민기본소득이냐 논쟁이 있다. “농민들이 농촌에서 살면서 이미 생산하고 있는 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과 더불어 공익적 가치를 더욱 증진시키는 의미로 농민수당을 지급하자는 것이에요. 기본소득은 좀 다르죠. 누구에게나 지급하자는 거니까. 경기도의 경우 이재명 지사가 연구를 많이 하고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하고는 기본소득 내용과 추진 상황이 달라요. 그런데 전남은 전남형 기본소득제를 추진한다고 하다가 포기했고, 충북도 마찬가지예요. 깊은 고민 없이 공약으로 내세웠다가 무산되고 결국 농민수당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전국 대부분의 상황이다. 농민수당이 대중화되면서 농민수당을 자기식화 한다고 농민기본소득을 이야기 했지만 경기도를 제외하고는 내용도 없이 베껴 쓰기 수준에서 정치적 환심을 사려는 것에 불과했다. “농민운동 진영에서 농민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해요. 깊게 연구하지 않고 쓰면 무책임해지니까요. 농민수당은 오랜 논의 끝에 만들어졌어요. 벽돌을 쌓을 때도 하루아침에 쌓으면 무너지듯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만 합니다. 농민수당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앞으로도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해요.”

지금 전남·북 일부지역에서 농민수당이 지급되고 있다. 농민수당이 지급되면서 우려했던, 혹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현재 시행하는 지역에서는 농업경영체를 지급대상으로 하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어요. 여성, 청년, 은퇴농 등이 제외되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야 정책의 완성도도 높아지거든요.”

이 뿐 아니다. 농민수당의 지급목적 중 중요한 것이 마을공동체의 활성화다. 그런데 현재의 제도는 마을공동체의 해체를 가져올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농민등록제가 도입돼야 해요. 지금의 제도로는 진짜 농민을 가려내지 못하잖아요. 마을에서 진짜 농민을 가려내자는 거죠. 그리고 취미농, 부업농 등 세세하게 들어가면 복잡한 게 많아요.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해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야 해요.” 박씨는 농민수당제 도입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낮은 단계에서라도 시작하면서 보완해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을 이장이 되다

한편 박씨는 제작년 장흥 월평마을 이장이 됐다. “2018년 12월 25일이 우리 동네 대동계 날이에요. 이날 이장이 됐어요. 마을에서 지난번 지방선거 나가서 떨어졌다고 이장 맡아서 사회활동 활발히 하라고 뽑아 줬어요.” 우스갯소리겠지만 마을 사람들은 나름대로 박씨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장을 시켰다. “20년 산 동넨데 농민회한다고 밖으로 돌아다니느라 마을분들이나 마을일 챙기는 걸 잘 못했는데도 덕을 너무 많이 보면서 살았어요. 그걸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가 이때 밖에 없다는 생각에 흔쾌히 맡기로 했어요.”

박씨는 이장을 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농민회 활동과 결이 좀 달라요. 동네 할머니께서 집 앞 가로등 불이 안 들어온다고 고쳐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장이 면에 이야기하면 되는데 깜박한거죠. 젊은 사람들은 가로등이 절실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이장한테 얘기했는데 소식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자꾸 이야기 할 수도 없고, 나중에 생각이 나서 고쳐 드렸더니 얼마나 고마워하시는지.”

소소하지만 각각의 이해관계를 잘 풀어야 하는 것이 마을일이고, 또한 내 입장이 아니라 주민들 개개인의 처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마을 이장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배웠어요. 하나의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죠.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살면서 되로 주고, 말 이상 더 많이 받은 거 같아요. 그래서 항상 겸손하고 정성을 다하며 살려고 노력해요.”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