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도 노래도 사라졌지만 ‘역사’는 남았다

경남 거창 적화지역 농민들, 마을 역사책 발간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기록한 마을 옛 이야기

  • 입력 2020.01.12 18:00
  • 수정 2020.01.12 18:31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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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 4일 경남 거창군 웅양면 하성단노을생활문화센터에서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 거창, 적화 14개 마을 이야기' 발간 기념 '적화 역사책 잔치'가 열렸다.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편찬에 참여했던 하성(적화)마을연사연구회 위원들.
지난 4일 경남 거창군 웅양면 하성단노을생활문화센터에서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 거창, 적화 14개 마을 이야기' 발간 기념 '적화 역사책 잔치'가 열렸다.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편찬에 참여했던 하성(적화)마을연사연구회 위원들.

‘노인 한 명이 세상을 뜨는 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달리 말해 ‘역사’와 ‘전통’이 사라지는 일이라 볼 수 있다. ‘농촌소멸’ 이야기가 나오는 이 시대는, 5,000년 우리 농촌의 역사와 문화가 통째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의 시대이다.

사라져가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남기고자 모인 농민들이 있다.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14개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농민들이 그들이다. 2016년 3월, 14개 마을 농민들은 “우리 동네를 알아보자”는 취지로 ‘하성(적화)마을역사연구회(회장 최석길, 마을역사연구회)’를 결성했다. 평균연령 75세였던 그들은 4년 동안 직접 14개 마을을 돌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결과 지난해 12월 30일, 농민들은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 거창, 적화 14개 마을 이야기>란 제목의 마을역사책을 발간했다. 지난 4일엔 이를 기념해 웅양면 하성단노을생활문화센터에서 책 출판기념 ‘적화 역사책 잔치’를 열어 한바탕 축제를 벌였다. 마을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헌신한 주민들로부터 들은 마을의 역사, 그리고 공동체문화 이야기를 풀어 본다.

마을공동체의 안녕 빌던 축제들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의 배경인 웅양면 14개 마을은 원래 ‘적화(赤火)’라는 지역의 마을들이었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지역의 옛 이름은 적화면(赤火面)이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웅양면에 편입됐고, 그나마 과거 이름의 흔적이 남은 적화국민학교도 1950년 ‘하성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적화’라는 단어가 적화통일(赤化統一)의 적화를 연상시켜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마을 전통문화는 유지됐다. 어디나 마찬가지였지만, 마을 전통문화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화합을 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상징하는 전통문화 중 하나가 마을 축제였다.

적화 14개 마을 곳곳에서 동제, 동신제(산지제), 당산제 등의 각종 전통행사들이 치러졌다. 별도의 행사들이지만 마을사람들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축제를 벌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산지제나 당산제의 경우 마을 입구의 조산(造山)에서 진행됐다. 조산은 마을 입구에 쌓은 돌무더기로, 마을의 안녕과 수구막이(마을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행위)를 위해 주민들이 돌을 모아 쌓았다.

역사책 편찬을 주도했던 마을역사연구회 전 회장 신현억 할아버지(적화 한기마을)는 과거 마을 전통행사의 준비 과정과 풍경을 증언했다.

“동제나 산지제도 그냥 지내는 게 아이라. 제관으로 뽑히마 1주일 전부터 목욕재개하면서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 카는기라. 제관 집 주변엔 금줄, 그러니까 출입금지 줄을 치가 부정한 사람은 몬 들어가게 카고.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온 산지제 전용 솥도 따로 썼다.”

“동제나 산지제 때는 밥 짓고 돼지 잡아 대가리 놔두고 마, 온 동네 잔치를 벌였다. 고사 지내면서 동네 사람들 전부 조산 앞에 모이가 절하고 우리 동네 1년 내내 무사태평하게 해달라꼬 기도했지. 그기 끝나모 달집놀이라 캐가 논두렁에 대나무를 모아 달처럼 둥글게 맹글어놓고 불피워가 태우며 꽹매기(꽹과리) 치며 막 돌면서 또 큰 잔치를 벌이는기라.”

이처럼 동제와 산지제, 당산제는 조상들을 기리는 제사일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화합하는 축제였다. 마을사람들은 이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다. 이름은 각각 다를지언정 이러한 전통축제들은 한반도 곳곳의 마을에서 행해졌다.

풀베기도, 노동도 ‘여럿이 함께’

적화의 옛 공동체 활동 중 ‘풀베기’라는 게 있었다. 옛날 농민들은 산의 풀들을 뽑아 논에 넣어 비료로 활용했는데, 풀베기도 농민들이 다같이 했다. 풀이 많이 안 자랐는데 일부 주민들이 먼저 베면 ‘반칙’이었다. 마을 머슴들은 음력 4월 초파일 전까진 주민들이 풀을 못 베게 하다가 초파일부터 ‘행동개시령’을 내렸으니, 이를 ‘영을 낸다’고 칭했다.

“‘아무 때나 풀 베마 되지 만다꼬(뭐한다고) 영을 내노’ 이래 생각할라 모르지만, 아무 때나 풀 베마 풀이 안 크잖아. 풀 크게 자라게 할라꼬 영을 내는기라. 다같이 풀 모아가 소거름이랑 비비고 섞어 비료로 줘삤다. 그라지 않으모 나락이 잘 안 컸다(신현억 할아버지).”

마을공동체의 생명력을 증명한 또 다른 문화장치는 노래, 특히 노동요였다. 노동요는 예로부터 조상들이 고된 노동 속에서 고통을 떨쳐내고자, 부른 노래였다. 적화의 경우 특히 ‘망깨소리’가 그 역할을 했다.

망깨는 옛날 못둑이나 집터를 다지고자 사용한 도구로, 무거운 돌에 큰 못 3~4개를 박고 3~4명이 잡은 뒤 함께 들었다 놨다 하며 땅을 다지거나 말뚝 박던 용도로 쓰였다. 워낙 무거운 도구라 들고 놓을 때마다 힘이 많이 들었다. 망깨소리는 이 망깨로 일할 때 부르던 노래다.

적화 한기마을의 경우 1960년대에 마을 내 한터못 보강공사가 있었다. 당시 이 마을의 윤임출이라는 어른이 망깨소리 앞소리를 그렇게 잘했다 한다. 윤임출 어르신이 “천 냥짜리 망깨는 공중에 놀고”라 앞소리를 ‘멕이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집 아들놈은 집에서 논다”느니, “이노무 자슥은 뭐하고 있노” 등등 별의 별 가사를 다 뒷소리로 붙였다. 말하자면 뒷소리는 정해진 가사가 없었다.

“앞소리 멕이고 뒷소리에 아무 별소리나 다 갖다붙이모 즐거워가 서로 웃어가면서 일하느라 고된 줄을 몰랐는기라(신 할아버지).”

거창지역에선 그 외에도 모심기 노래, 베짜는 노래, 삼베일 소리 등등 여러 노동요들이 불러졌다.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저술에 참여했던 백종숙 마을역사연구회 지도위원은 “특히 삼베일 소리의 경우 당시 거창 농가들 중 삼베를 안 삶던 곳이 없다 보니 거의 모든 농민들이 다 부르던 노래였으나, 지금은 극히 일부 전통연구자들에 의해 전승될 뿐”이라고 현 상황을 밝혔다.

‘미신, 구습’이라 불리며 사라진 전통

1975년 경남 거창군 적화지역 아주마을 주민들이 마을 입구 조산(造山)을 해체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당시 박정희정권은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며 조산 등 옛 전통문화를 ‘미신’, ‘구습’으로 취급하며 없애라고 명령했다. 이 사진은 아주마을 농민 문일호 할아버지가 하성(적화)마을역사연구회에 기증한 사진이다. 사진 왼쪽 세번째 인물이 문일호 할아버지다.하성(적화)마을역사연구회 제공
1975년 경남 거창군 적화지역 아주마을 주민들이 마을 입구 조산(造山)을 해체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당시 박정희정권은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며 조산 등 옛 전통문화를 ‘미신’, ‘구습’으로 취급하며 없애라고 명령했다. 이 사진은 아주마을 농민 문일호 할아버지가 하성(적화)마을역사연구회에 기증한 사진이다. 사진 왼쪽 세번째 인물이 문일호 할아버지다.하성(적화)마을역사연구회 제공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도 살아남았던 마을의 전통들은 ‘조국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졌다. 1960~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정부는 옛 전통행사에 ‘미신’, ‘구습’이란 딱지를 붙이면서 금지했다. 마을의 안녕을 빌고자 농민들이 쌓았던 적화의 조산들도 1973~1975년 동안 정부 명령으로 다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조산의 돌들은 마을 하천공사에 쓰였다. 수백년, 수천년 쌓인 농민들의 염원이 허물어지는 과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군사혁명(5.16군사정변) 뒤에 동제고 산지제고 ‘전부 하지 마라! 미신이다!’ 카면서 금지시켰다. 큰 나무나 돌 같은 거 만질라 케도 미신이라며 건들지 말라 캤다. 집도 새마을작업이라 카며 대통령 명령으로 초가집 다 허물어뿌고 슬레이트 지붕 얹은 집 지었는기라. 그때 많은 옛 풍습들이 사라졌지(신 할아버지).”

당시엔 ‘부’라 하여 농민들이 나무 판때기 등에 소원을 적어 나무에 걸어놓는 게 있었다. 이걸 적으면 후환이나 탈이 없다고 믿었다. 조산과 초가집, 서낭당을 철거하면서 주민들은 마지막으로 부를 적었다.

“대통령 명령으로 새마을작업을 시행합니다. 조산을 없애고 서낭당도 없앨 건데 그리 해도 우리 마을에 해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30년 만에 태어난 아기를 위하여

경남 거창군 적화지역(일명 하성지역, 현 거창군 웅양면) 농민들의 마을역사책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 거창, 적화 14개 마을 이야기' 편찬을 주도했던 하성(적화)마을역사연구회 전 회장 신현억 할아버지. 그의 손에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완성본이 들려 있다.
경남 거창군 적화지역(일명 하성지역, 현 거창군 웅양면) 농민들의 마을역사책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 거창, 적화 14개 마을 이야기' 편찬을 주도했던 하성(적화)마을역사연구회 전 회장 신현억 할아버지. 그의 손에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 완성본이 들려 있다.

 

이 모든 옛 전통이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백 지도위원은 아주마을에서 지금도 이뤄지는 동제를 이야기했다.

“100여년 전 아주마을에 살던 성주 여씨와 청주 한씨, 부부관계인 평산 신씨와 경주 최씨 등 네 명은 자손이 없어 자신들의 농지를 마을 재산으로 내놓았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뒤 주민들은 네 어르신을 기리는 제사를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지냈다. 과거엔 이 농지에서 도지를 받아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흘러 농사지을 사람이 없게 돼 10년 전 네 어르신의 산소를 동네 밭으로 이장했다. 네 어르신을 기리는 이 동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2016년 적화 농민들이 모여 역사책을 쓰고자 한 것도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간 전통문화를 후대에 알리고, 이를 복원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농민들의 노동 현장에서 축제도, 노래도 사라졌지만, 적화 농민들의 노고로 이 모든 ‘역사’는 남았다. ‘역사’가 남는 한 그것의 복원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4일 행사에서 만났던 한 적화 농민이 말했다. “5개월 후 적화 오산마을에 신생아가 태어난다. 30년 만에 적화에서 태어나는 신생아다.” <적화차를 타는 사람들>을 통해 농민들은 30년 만에 이 마을에서 태어날 아이에게 이 땅 농민들의 귀한 전통과 역사를 알려주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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