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파사③ 진공관•트랜지스터•유선 스피커

  • 입력 2020.01.12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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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라디오를 제작해서 공산품으로 판매했을까?

이런 저런 기록에 의하면 1957년에 <삼양전기>에서 라디오를 생산 판매했던 것이 해방 후 첫 국산 라디오의 등장으로 올라있다. 물론 수신기의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 판매한 것이었다. 바로 이어서 이듬해인 1958년에는 <금성사>가 또한 라디오 생산 업체로 등장했다. 이때의 라디오는 건전지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전기에 꽂아 쓰도록 돼 있는 진공관식 라디오였다.

우리에게 ‘전파사’ 관련 얘기들 들려주고 있는 이해중 씨의 경우 중학교 3학년 때이던 1959년에, 그의 집에 바로 그 삼양라디오가 있었다고 자랑한다. 자랑할 만했다. 1959년도의 우리나라 전체 라디오 보급대수가 30만대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충청도 부여의 시골마을에 살면서 그 귀한 ‘신문명 기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그래도 근동에서는 방귀깨나 뀌던 부잣집이었음에 틀림없다.

“당연히 재산목록 1호였지요. 그 때가 국산품 생산 초기였으니까 값이 비쌌어요. 라디오 한 대 값 치르느라 쌀을 몇 가마씩이나 내놨다는 등의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 라디오는 휴대용이 아니라 탁상용이었어요. 그런데 동네 젊은이들 몇이 그 라디오를 어느 잔칫집으로 가져가서 듣다가, 술 취한 사람이 망가뜨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경찰지서에 신고를 한다, 송사를 벌인다, 하며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바로 그때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하던 이해중의 둘째 형이 휴가를 나왔다.

-아이고 참, 형님, 그런 걸 갖고 뭘 마을 사람끼리 고소를 하네 마네 그러십니까. 내가 부대에 가서 그보다 훨씬 좋은 걸로 하나 구해다 드릴게요.

그 때를 놓칠세라, 중3짜리 이해중이 끼어들었다.

-형님, 나도 라디오 하나 있었으면 좋겄는디…미군부대에는 들고 댕기는 라디오도 있다고 하든디…구할 수 있으면 하나만 갖다 줘유.

그렇게 해서 이해중은 형을 잘 둔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갖게 되었다.

“형님이 나한테 준 것은 미제가 아니라 일제 <나쇼날> 트랜지스터라디오였어요. 라디오 본체보다 더 큰 6볼트짜리 충전용 건전지를 한 데 묶어 갖고 다녀야 했지요. 건전지가 다 닳아서 바꾸려면 두 손이 완전히 숯검댕이가 되기 일쑤였고….”

1960년대에 접어들자, 라디오가 없는 가정에 스피커를 설치해서 KBS 라디오 방송을 유선으로 보내주고 청취료를 받는 민간업자가 생겨났다. 초기에는 현금 대신에 추수철에 쌀 몇 됫박씩을 받기도 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텔레비전의 유선방송업자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물론 대도시의 경우 라디오의 보급 사정이 훨씬 좋았기 때문에, 유선방송 스피커는 주로 시골마을의 가정에 설치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웃 섬마을의 내 외갓집에 갔는데, 마루 위 기둥에 바로 그 스피커가 부착돼 있었다. 그런데 마을마다 스피커로 방송을 송출해주는 그 업자에게 예쁜 딸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이웃집 청년 두 명이 외갓집에 오더니, 바로 그 유선방송 스피커에다 입을 갖다 대고는 고래고함을 질러댔다.

“어이, 박 사장! 나는 화전리 사는 전봉식인디, 자네 딸 춘심이 나 주소!”

스피커에 대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방송을 송출하는 그 업자에게 들릴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화기처럼 유선으로 연결돼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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