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생태학 운동,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쿠바 농생태학 실천운동이 우리 농정에 던지는 메시지

  • 입력 2020.01.05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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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유기농업으로 자립을 실현한 사례로 쿠바가 여러 번 소개됐다. 그때마다 방점은 도시농업에 찍혔다. 도시 내에서 유기농업을 실천하고 지렁이, 우렁이로 친환경농사를 멋드러지게 짓는 쿠바 사람들의 이야기는 농업의 미래를 고민하는 모두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졌다.

오늘 또 쿠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번엔 주제가 좀 다르다. 기후위기가 심화되면서 지구의 지속가능성이 우려되는 2020년 현재, 쿠바에선 어떻게 농업정책을 만드는지 살펴보려 한다.

지난해 11월 쿠바에서 쿠바소농협회(ANAP, 아납) 주최로 ‘7차 농생태학 국제 컨퍼런스(2019년 11월 18~23일)’와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기술방법론 교육(2019년 11월 25~29일)’이 진행됐다. 우리나라의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국제조정위원 등 전 세계 각국의 농민들이 최근 쿠바의 실천운동을 배우러 갔다. 쿠바에서 이들에게 내놓은 답변은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전해지는 농생태학’이었다.

쿠바의 농생태학 실천운동

지난해 11월 아바나 인근 농장을 방문한 각국 방문단이 쿠바 농민들로부터 농생태학 실천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국제조정위원 제공
지난해 11월 아바나 인근 농장을 방문한 각국 방문단이 쿠바 농민들로부터 농생태학 실천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국제조정위원 제공

 

농생태학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농업 과정에서 담보돼야 할 생물다양성과 생태환경의 다양성은 물론이고, 농사방식과 재배작물, 참여주체의 다양성까지, 다양성의 종류 또한 다양하다. 소농들이 유지한 전통농업 기술 또한 농생태학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니, 문화다양성도 포함된다.

쿠바의 농생태학 실천운동은 이 ‘다양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된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아납은 농생태학의 의의를 ‘경제적으로는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고, 사회적으로는 지역주민의 식량 접근성을 높이며, 환경적으로는 지역환경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 설명한다. 2019년 현재 아납 소속 15만9,335농가 중 72%가 농생태학 실천운동에 동참한다.

농생태학 실천방법도 다양하다. 국내에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농민들이 실험하는 방법인 사이짓기, 섞어짓기, 밭 가장자리에 키 큰 식물 심어 울타리 만들기 방식을 비롯해 △담배잎으로 벌레 방제 △지렁이 분변토를 액비로 활용 △경축순환농법 △녹비작물 심기 △과일나무에 벌을 유인할 화분으로서 통나무 이용 △달력을 이용한 파종·재배 등이다. 사실 이러한 실천방식은 그동안 국내에 많이 소개됐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건 다른 데 있으니, 그건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Campesino A Campesino)’라는 실천방법론이다.

농민들 스스로 성과와 고민 공유

쿠바를 다녀온 김정열 국제조정위원은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방법론의 핵심으로 ‘참여적 신속진단’을 강조했다.

참여적 신속진단이란 농민들이 다른 농민들의 농지를 방문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피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지 공유하는 과정이다. 단순히 한 번 방문해 조언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방문해 농지 및 농사방식의 발전과정을 살피는 게 필수다.

이 진단의 목적은 결코 ‘잔류농약 검출’이 아니다. 오히려 농생태학 실천의지가 있는 농민을 지원·응원하는 목적에서 이뤄진다. 참여적 신속진단 과정에선 △농가 생산량 △생산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 △작물 순환 방식 △병해충 방제 방식 △토양 수분 유지를 위한 물의 사용 최적화 방식 △토종씨앗 보전 여부 △토양 상태 등을 확인한다. 이와 함께 농가에서 성평등 관점을 얼마나 적용하는지, 생산결과를 잘 분배하는지 등의 정치·사회적 지표도 확인한다.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방법론의 행위자는 크게 촉진자(Facilitator), 지도농민(Promotor), 코디네이터(Coordinator), 동맹그룹 등으로 나뉜다. 촉진자는 일종의 활동가로, 농생태학 실천의지가 있는 농민들을 위한 소통·일정 조율과 정보전달 역할을 한다. 지도농민은 농생태학 경험을 오래 쌓은 농민들로, 이들이 구체적인 농생태학 실천방식을 지도한다. 코디네이터는 일종의 준공무원으로, 농생태학 방식을 농민들에게 홍보하는 역할을 한다. 동맹그룹은 농생태학을 연구하는 대학·농관련기관의 연구조직들이다.

실천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지난해 11월 쿠바에서 열린 ‘7차 농생태학 국제 컨퍼런스’ 참가자들이 한 농장을 방문해 농생태학 실천상황을 살피고 있다.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국제조정위원 제공
지난해 11월 쿠바에서 열린 ‘7차 농생태학 국제 컨퍼런스’ 참가자들이 한 농장을 방문해 농생태학 실천상황을 살피고 있다.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국제조정위원 제공

 

우리나라의 친환경인증제가 유기농·무농약의 두 단계로 나뉘듯이,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활동에 동참하는 농가들은 3단계로 범주화된다.

1단계 농가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농생태학 실천을 시작한 농가들로, 전국에 약 12만 농가가 있다. 이들은 농생태학에 대한 실천 의지를 갖고 1~3가지 이상의 새 농법을 도입한 농민들이다. 이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 반드시 농약이나 화학비료 사용을 하루아침에 중단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들에겐 주(州) 정부에서 확인서를 준다.

2단계 농가는 전국에 약 2만5,000여 농가인데, 다양한 작목을 재배하면서 농생태학 실천수준을 높이는 농가들이다. 이 농가들은 화학농자재 사용을 많이 줄인 농가들(아예 사용을 중단한 농가가 아니더라도 포함된다)이며,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협동조합에 참여해야 2단계에 진입할 자격이 주어진다. 이들에겐 주 정부에서 확인서 수여식을 하면서 사기를 드높인다.

완전한 수준의 농생태학 실천농가인 3단계 농가는 쿠바에서도 881농가 밖에 없다. 이들은 지도농민으로서 농생태학 실천농가들을 지원하며, 농생태학을 통해 외부자원(석유, 화학비료 등)에 의존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농민들이다. 농가의 의사결정을 한 사람이 하지 않고 반드시 여럿이 함께 결정하는 것도 조건이다.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는 우리나라의 친환경인증제처럼 ‘잔류농약 검출여부’를 따지는 정책이 아닌, 농생태학 실천의지가 있는 농민을 지도·육성하기 위한 운동이다. 우리나라의 인증제는 농민 간의 소통을 권장하지도, 농민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농사방식이 필요한지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토양을 깨끗하게 살리고자 일부러 기존 관행농지에서 농사를 시작한 농민이든, 농약이 농지에 비의도적으로 섞여 피해를 본 농민이든, 국가 인증기준에 조금이라도 미달되면 탈락이다. 이번에 친환경농업 관련 ‘의무교육’이 시작된다고 하나, 여전히 농림축산식품부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등 관 주도로 이뤄지는, 사실상 ‘공무원에게서 농민에게로’ 하향 전달되는 교육이란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살아남기 위한 실천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방법론은 쿠바에서 처음 만들어진 건 아니다. 이 방법론은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 각지에서 벌어진 수평적 농민네트워크 운동의 방법론으로 활용됐다. 이를 통해 전통적 생태농업 방식을 공유하고 농민들의 연대를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방법론이 국가 차원의 대안농정 수단으로 발현된 나라는 쿠바가 세계 최초다. 쿠바 정부는 1996년부터 농생태학 농업방식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쿠바 내 2개 주에서 본격적으로 농생태학 실천운동이 벌어졌고, 2000년엔 4개 주로 확대됐다. 지금은 쿠바 전역에서 실시되고 있다.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실천운동이 본격화된 요인 중엔 기후위기가 있었다. 쿠바는 기후위기로 허리케인 등의 자연재해 및 해수면 상승문제를 겪고 있다. 쿠바 정부에 따르면, 이대로 기후위기가 계속될 시 2050년엔 쿠바의 해수면이 0.27cm 높아지며, 2100년엔 쿠바 영토의 60%가 물에 잠긴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김정열 위원은 “쿠바 정부는 최근 7차 공산당 대회에서 기후위기 대응 아젠다를 설정하는 등,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기후위기에 대한 위기의식이 강하며 위기 극복을 위한 실천노력도 강하다. 현재는 쿠바 헌법에 기후위기 극복노력 관련 내용을 넣으려는 상황”이라며 “이 문제를 범세계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농생태학을 다른 나라에도 적극적으로 전파 중인 상황”이라 밝혔다. 말하자면, 농생태학 실천운동은 쿠바인들에게 ‘살아남기 위한 실천’이다.

쓰레기장이 농생태학 농지로

그 ‘살아남기 위한 실천’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과를 보고 있다. 2008년 허리케인 아이크(Ike)가 쿠바를 할퀴었을 때, 기존의 대규모 단작농사 지역은 90~100%의 피해를 입은 반면 농생태학 실천이 이뤄진 농지는 50%의 피해를 입었다. 피해 회복도 빨랐다.

김정열 위원은 쿠바에서 방문한 농생태학 농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거 1990년대 초반까지의 단작화 농업 과정에서 훼손된 땅을 받은 농민이 있었다. 그는 원래 기술자였다가 농사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그 땅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랬던 곳이 농생태학 실천활동 과정에서 지금은 토양과 생태환경이 살아났다. 그 농민이 농생태학 실천활동에 뛰어든 이유는 ‘쿠바의 농지가 너무 심하게 훼손돼서’였다. 그는 자신이 가꾼 농생태학 농지를 ‘또 하나의 세계’라 표현했다.”

쿠바의 농생태학 실천운동은 올해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실천은 그 누구보다도 농민들의 하나 된 힘으로,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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