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파사② 확성기가 있었고 유성기도 있었다

  • 입력 2020.01.05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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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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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충청도 부여의 한 자연마을.

동네 확성기가 켜지더니 한동안 깨도 볶고 콩도 볶다가 이윽고 이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아, 아…시방 내 목소리 나오는 것이여? 아, 나온다고? 에…주민 여러분께 본 부락 이장이 한 말씀 알려 드리겄습니다. 지난달에 신청했던 비료가 나왔으니께, 주민 여러분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시방 즉시로 마을회관으로 나와서 비료를 타 가시기 바라겄습니다. 그라고, 그저께 놓았던 쥐약은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치워 주셔야겄습니다. 오늘 아침에 조성남 씨 집 개가 쥐약을 묵고 죽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으니께….

마을회관에 설치된 확성기는 공동체의 이러저러한 공지사항을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장 노릇은 힘든 일이었으나, 확성기의 마이크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매력이자 또한 권력이었다. 확성기로는 그런 공지사항만 알리는 것이 아니었다.

-제5차 아시아 반공대회가 오늘 서울에서 개최됐습니다. 아시아 각국이 굳건한 반공태세를 가다듬기 위해 열린 이번 대회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14개 가맹국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일본제 제니스라디오를 확성기에 연결해서 주민들에게 관급 뉴스를 전달하기도 했고, 더러는 유행가요 몇 곡씩을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확성기의 마이크를 라디오에다 대고 들려주는 방식이었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었다.

또한 주민들 모두가 한 군데에 몰려 사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외딴 집에 사는 사람은 확성기 소리가 작아서 불만이었고, 마을회관 턱밑에 사는 사람은 또 시끄러워서 아우성이었다.

그런 중에도 집안에 개인용 라디오나 유성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게는 있었다. 특히 유성기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으므로 웬만큼 여유 있는 집이 아니면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다.

“당시 우리 마을에 유성기 갖고 있는 집이 세 집이었어요. 그 중 한 집은 손으로 테이프를 돌려서 노래를 들려주는 초창기 제품이었고, 또 한 집은 거기서 조금 발전한 것이었는데 나팔이 길게 달려 있는 모양이었어요. 나머지 한 집의 유성기는 네모반듯한 궤짝 모양이었는데, 그 유성기들 모두 음질이 안 좋기로는 다 비슷비슷했지요.”

충청도 부여가 고향인, 40년이 넘게 온갖 전기‧전자 제품을 수리하며 살아온 전파사 주인 이해중 씨의 회고다.

그 시절의 유성기는, 음악 감상이라는 본래의 기능은 부차적이었고, 마을에서 좀 산다 하는 사람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 주는…장식용, 혹은 과시용으로서의 쓸모가 더 빛났다. 그래서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모셔졌다.

-어이, 갑장! 자네 집에 있는 그 유성긴지 축음긴지 그거 틀어서 남인수 노래 좀 들어보세.

-바늘 닳아서 안 뒤야. 유성기 바늘 그놈 하나 살라면 쌀 두 되는 줘야 한다니께.

그 시절엔 레코드 한 장에 수록된 노래를 다 들으려면 새 바늘 하나를 다 소모했을 정도로 바늘이 쉬이 닳았고, 그나마 시골에서는 구하기도 힘들었다. 때문에 특별한 사람의 청이 아니면 쥔장은 좀처럼 유성기판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성기판, 즉 레코드의 품질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돌리다 보면 홈이 깊게 파여서 바늘을 다음 홈으로 넘겨주지 못하게 되고, 그런 경우 유성기는 같은 구절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결국 사람이 바늘을 들어서 옮겨 주어야 했다. 어쨌든 그 시절에는, 그것이 전쟁의 비극을 담은 내용이든 이별의 아픔을 읊은 것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저 기계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히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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