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파사① 거리마다 ‘전파사’가 있었다

  • 입력 2019.12.3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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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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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 전파사의 진열창 바깥에 길 가던 사람들이 뭉텅이로 모여서 웅성거린다. 모두는 도로 쪽에 등을 보인 채 전파사의 안쪽을 향해 고개를 빼고 있다. 전파사에서 행인들을 위해 일부러 진열창 밖을 향해 놓아둔 흑백텔레비전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 열기가 달아올라서 어느 결에 웅성거림은 왁자함으로 바뀐다.

-어? 타이거 마스크 저 놈, 반칙이야, 반칙!

-저거 칼 아니야? 저놈이 뒤에서 흉기를 꺼냈어! 아이고 쓰러지고 말았네.

-야, 김일이가 일어났다. 인제 넌 죽었다. 박치기를 해, 박치기!

-에이, 갑자기 테레비가 왜 이래! 시방 김일이가 막 박치기 들어갈 참인데….

-어이, 전파사 주인! 테레비 좀 어떻게 살려봐! 안 되면 좀 두들겨 패보든가….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흑백텔레비전으로 중계하는 경기장면을 보려고 그렇게 전파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복면을 한 외국 선수의 반칙으로 우리의 김일 선수가 피투성이가 되자 두 손에 진땀을 쥐고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이윽고 김일이 호쾌한 박치기로 상대를 매트에 거꾸러뜨리는 순간 손뼉을 치고 만세를 부르고…구경꾼들의 열기가 절정으로 달아오른다. 갈 길이 막혀 울려대는 삼륜용달차의 경적 따위야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이고, 잘 봤다. 역시 김일이 박치기에는 당해낼 놈이 없어.

-히야아, 그냥 한 방 들이받으니까 썩은 나무토막처럼 나가떨어지는 거 봐.

레슬링 경기가 끝나자 갈바람에 낙엽 흩어지듯 사람들이 자리를 떠난다. 전파사 앞에서 발길을 돌리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떠안고 살아야 했던 고단하고 가난한 환경을, 일거에 반전시켜 줄 수 있는 ‘박치기 한 방’을 저마다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김일 레슬링이 최고 인기였지요. 길 가던 사람들이 전파사 진열창 앞에 아예 진을 쳤고, 다방에서는 텔레비전 쪽으로 좌석을 미리 다 돌려놓고 손님을 받았다니까요.”

충남 부여가 고향인, 1946년생 이해중 씨의 얘기다. 60년대 후반부터 이해중은 전파사의 ‘진열창 바깥에서’ 레슬링 경기를 구경하던 사람이 아니라, 양팔에 토시를 끼고서 ‘전파사 안에 앉아서’ 일을 하던 기술자였다.

프로레슬링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읍내 전파사’라는 키워드가, 초가집 처마 밑에서 찍은 옛적의 흑백사진처럼, 줄줄이 불러내는 그 시절의 생활상을 더듬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트랜지스터라디오 하나가 청소년들의 소망이었고, 인기 연속극 「여로」를 보기 위해 흑백TV가 있는 동네 부잣집으로 몰려가던 바로 그런….

2002년 3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의 안남중학교 정문 앞 주택가 골목을 감아 돌자 ‘복음전자전기’라는 남루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간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침침한 지하 계단을 내려가니 20여 평의 공간에 텔레비전을 비롯해서 라디오, 녹음기, 전축, 전기밥솥, 모발 건조기 등의 중고 전기‧전자 제품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반백의 머리를 한 남자가 공구를 들고 무엇인가 분해하고 조립하고 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해중 씨다.

“사람들이 배가 불러선지 게을러선지 스위치만 한 번 작동 안 돼도 그냥 내다버려요. 잠깐 손보면 멀쩡한 데 말예요. 육칠십 년대 그 시절에는….”

바야흐로 ‘그 시절’ 얘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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