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농 중시’ 개방농정이 나라 망친다

  • 입력 2020.01.01 00:00
  • 수정 2020.01.01 13:17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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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소농이 사라지면 국가와 공동체도 망가진다. 소농을 배제하는 농정은 농민층을 양극화시킴으로서 절대 다수의 농민들을 가난하게 만든다.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며, 그 땅에서 자라던 토종작물도 사라지게 된다. 농업생산량도 감소하는 데다 오랫동안 유지된 지역공동체가 해체되며, 최악의 경우 농민들을 무법지대로 몰아넣는다.

소농 배제 정책으로 공동체와 국가에 피해를 끼친 일부 사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특히 멕시코 사례는 ‘농업선진국’을 표방하며 개방농정으로 나아가는 한국의 반면교사가 될 만하다.

‘소농 보전책’ 제 손으로 없앤 멕시코

2020년 현재 멕시코는 마약범죄의 온상으로 전세계에 낙인찍혀 있다. ‘마약 카르텔’이라 불리는 조직들이 활개 치며 마약 유통, 강간,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 멕시코 공권력도 이들을 어찌 못한다. 어떻게 이들이 성장할 수 있었을까. 이 상황은 소농을 짓누르고 대농 중심 개방농정을 추진한 멕시코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1992년, 한창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추진하던 멕시코 정부는 헌법 27조의 ‘에히도(Ejido) 보전 내용’을 삭제했다. 에히도란 소농들의 공동소유·공동경작 농지로, 20세기 초 멕시코혁명 이후 법적으로 보전 의무가 만들어졌다. 국가가 소농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였음에도 멕시코 정부는 그 안전장치를 풀어버렸다.

헌법 개악으로 비(非)농민이나 외국인도 농지를 가지게 됐다. 멕시코 정부는 12개 주요 작물의 약정가격수매제 등의 보조금을 없앴고, 대신 미국에 수출할 상품작물들을 파는 대농을 대대적으로 육성했다.

사라져 간 토종옥수수

그 결과 멕시코의 농업은 붕괴됐다. 특히 멕시코인들의 주식인 옥수수를 재배하는 소농들이 치명타를 입었다. 1994년 NAFTA 시행 직후 멕시코의 옥수수 가격은 20% 폭락했고, 그 뒤 계속해서 하락했다. 대신 미국 농식품기업들의 값싼 옥수수가 대거 수입됐다.

대농 중심 농정 속에서 토종옥수수 재배농가들의 설 자리도 사라져갔다. 국제옥수수밀연구소(CIMMYT)의 연구진들은 지난 2016~2017년 멕시코 모렐로스 주에서 토종옥수수 재배 가족농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1966~1967년 해당 지역에서 토종옥수수를 재배하던 66개 농가들이 50년 후인 2016~2017년 시점에도 옥수수를 재배하는지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 결과, 66개 농가 중 13개 농가만이 1966~1967년과 같은 종류의 토종옥수수를 재배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토종옥수수 종자를 폐기하고 멕시코 정부가 권장하던 ‘하이브리드 옥수수’를 심거나 농사 자체를 접었다. 1992년의 헌법 개악으로 농지 거래 제한을 풀어버린 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토종옥수수를 지켜온 농민들은 나이가 듦에 따라 고산지대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속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농업환경 악화로 고령농의 자식들은 농사를 잇는 대신 도시로 떠났다.

국가가 떠난 자리에 마약조직이

개방농정 속에서 농민의 6분의 1이 농토를 떠나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저임금 공장노동자가 됐다. 농민들은 미국에 수출할 물품을 만드는 조립가공업체들(마킬라도라)이 조성된 북부 도시들로 ‘이촌향도’했다. 이 마킬라도라들은 다국적 기업들의 하청업체들이었다.

농촌에 남은 농민들이 살 길은 사실상 하나였다. 마약 재배였다. 국가가 농민을 내팽개치자 마약 카르텔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농민들은 옥수수 재배만으론 생활이 어렵기에, 마약 카르텔들이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줬다. 대신 농민들은 마약 카르텔이 팔 마약을 재배해야 했다. 거부할 시 마약 카르텔 조직원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마킬라도라로 간 농민들의 안전도 위협받았다. 마킬라도라 산업의 중심지인 멕시코 북부도시 시우다드후아레스에선 날마다 수백명이 마약 카르텔에게 살해당했다. 그 대부분은 농촌 출신 여성노동자들로, 마약 카르텔은 이들에게 성폭력을 가한 뒤 죽였다.

멕시코 정부는 ‘농업선진국’을 표방하며 에히도 체계를 붕괴시켰고, 1994년 NAFTA 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해 ‘선진국’이 됐다. ‘선진국’ 멕시코는 원래 옥수수를 자급하던 나라였으나 현재는 세계 3위의 옥수수 수입국이며, 세계 1위의 마리화나 공급국이자 세계 3위의 헤로인 공급국이다. 그리고 ‘선진국’ 멕시코에선 2007~2010년에만 5만건 이상의 마약 관련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신자유주의 농정이 파괴한 공동체

네덜란드의 얀 다우 판 더 플루흐 바게닝겐대학 교수는 자신의 저서 「새로운 농민」에서 페루의 카타카오스(Catacaos) 지역공동체 사례를 들며 대농·대자본 중심 농정이 어떻게 지역사회를 망가뜨리는지 보여줬다.

카타카오스 지역에선 1970년대부터 소농들이 모여 공동생산단위를 만들었다. 농민들은 버려진 땅을 점거한 뒤 그곳에서 면화농사를 지었다. 1980년대 말엔 카타카오스 내 6,750ha 면적에서 4,500여명의 농민이 150개의 공동생산단위를 꾸렸다. 그 중 한 생산단위인 ‘산 파블로 수르’에선 1976년 1ha당 12카르가(적재단위)이던 생산량을 1988년 28카르가까지 늘렸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페루 정부는 농업분야에 신자유주의 논리를 도입하며 농지 개인소유권 강화정책을 펼쳤고, 공동생산단위도 개인 필지들로 쪼개기 시작했다. 여기에 페루 정부의 대농 지원정책이 겹쳐졌다. 면화 단위수확량은 2000년대 초반 들어 10카르가 수준으로 떨어졌다.

카타카오스의 고품질 면화 ‘피마 엑스트라-라지’는 2000~2015년 사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 인해 적절한 수준의 면화 공급이 어려워진 페루의 섬유산업도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카타카오스 지역공동체는 사실상 해체됐다. 소농들의 조직체로서 기능한 공동생산단위는 해체돼 개별 경영체로 바뀌었는데, 이들은 카타카오스에 들어선 대규모 농업경영체를 상대하기 버겁다. 이 대규모 농기업들은 지역 수자원을 독점 중인데, 이들이 토지 1ha에 물을 공급할 때마다 카타카오스 농민들은 하류지역 4~5ha 면적에서 쓸 수 있는 물을 빼앗긴다. 이 농기업들이 생산하는 바나나·포도·파프리카 등의 상품작물로 거두는 수익은 단 한 푼도 카타카오스 농민에게 안 돌아간다.

플루흐 교수는 “(카타카오스에서)토지는 더 이상 농업생산에 사용되는 노동의 대상이 아니며 바이오에너지 생산이나 광업, 투기 목적으로 이용된다”고 지적했다. 농민들이 주인이던 땅에서 사실상 농민이 소외되는 상황이다.

※참고문헌 :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반다나 시바, 책세상, 2017), <빈곤의 연대기>(박선미·김희순, 갈라파고스, 2015), <새로운 농민>(J. 판 더 플루흐, 2019,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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