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선진국에는 농민이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농업선진국
정부, 재배면적 기준 ‘EU식 직불제’ 도입 후 20년 간 방치
개도국 지위는 고의적 무시 … 뒤늦은 ‘공익형직불제’ 공염불

  • 입력 2020.01.01 00:00
  • 수정 2020.01.02 15:57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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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김옥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이 지난해 10월 2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정부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입장에 항의하던 중 빚만 늘어가는 농업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성농민 이야기를 하며 눈물짓고 있다.한승호 기자
김옥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이 지난해 10월 2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정부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입장에 항의하던 중 빚만 늘어가는 농업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성농민 이야기를 하며 눈물짓고 있다.한승호 기자

 

농민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살농정책’이라는 단어가 있다. 농민을 죽이는 농정이란 뜻이다. 법전에선 이미 농민 대신 ‘농업인’이라는 호칭이 쓰이고 있으며, 농정당국은 그 농정의 틀에 맞는 농업인만을 보살피려 한다고 말한다.

그 틀이 워낙 강력한 나머지, 농민들이 인간답게 살아보자며 아래에서부터 스스로 만든 농정 ‘농민수당’조차 그 살농정책의 대열에 동참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 제대로 된 농업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성·청년·은퇴·고령 농민 등은 받을 수 없어 농민수당이 ‘농업인수당’, ‘농가수당’이 돼 버렸으니 만든 농민들 입장에선 기가 찰 현실이다.

우리 농정에서 가족이라는 단어는 사라진지 오래다. 이제 농사를 짓는 최소단위는 한 사람의 농민이 아닌 경영체나 법인이 됐다. 자기선언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완전히 벗어난 우리나라는 이제 ‘농업선진국’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농민이 없는 나라를 과연 농업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농정>은 새해를 맞아 그들이 잊고 있는 ‘농민’의 고통, 그리고 그들의 가치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농업선진국
정부, 재배면적 기준 ‘EU식 직불제’ 도입 후 20년 간 방치
개도국 지위는 고의적 무시 … 뒤늦은 ‘공익형직불제’ 공염불

우리나라는 지난해 10월 25일, 스스로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며 일명 ‘농업선진국’의 반열에 스스로 올라섰다. 모든 농민단체들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주권 포기라며 한데 뭉쳐 일제히 반대했다. 농민들은 우리 농촌 현실과 농업 정책 중 어느 것도 아직 선진국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는 점을 누차 강조했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없는 농민들 대신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세운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역시 결국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농업 예산규모와 집행방식을 놓고 봤을 때 이미 우리나라는 정책적으로 농업선진국에 가까웠다. 혹은, 적어도 그러한 국가들을 뒤쫓아 비슷한 농업구조를 만들기 위한 농정을 펼쳐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 농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대 초중반에 걸쳐 도입된 쌀 소득보전 직불제의 경우 유럽연합(EU)이 한발 앞서 시행하고 있던 공동농업정책(CAP)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재배면적에 높은 비중을 두는 직불금 지급기준이 핵심인 보조금 정책으로, 쉽게 말해 농사를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직불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구조다.

문제는 우리 농촌의 체질이 아직 이러한 형태의 농정을 적용하기엔 너무나도 부적합하다는 사실에 있다. 2015년 농림어업총조사에 따르면 그해 우리나라에서 쌀농사를 지은 농가는 63만5,364가구였다. 소농의 기준선을 어디쯤에 둬야 하냐는 것은 늘 의견이 분분한 사안이지만, 최근 마련된 공익형직불제 내 ‘면적직불금’의 첫 기준 구간이 0.1ha 이상 2ha 미만인 것을 참고해 쌀을 기준으로 재배면적 2ha 이하를 소농이라 가정해보면 그 수는 55만8,893가구로 전체의 87%를 넘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소농들이 차지하는 논 면적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2015년 농림어업총조사를 통계청의 ‘마이크로데이터통합서비스(MDIS)’를 통해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논 있는 농가’ 가운데 2ha(6,000평) 이하의 재배면적을 가진 농가들이 경작하는 논 면적은 약 1만6,525ha다. 전체 쌀 수확면적 72만9,282ha 가운데 2.2%를 겨우 웃도는 수치다. ‘쌀 전업농’이 되기 위한 최소 요구 재배면적인 6ha(약 1만8,000평) 선 미만으로 소농의 범위를 늘린다 해도 그 면적은 약 11만261ha(15%)에 불과하다.

매해 고정직불금이 지급되는 시기 발표되는 1인당 평균 직불금 수령액은 100만원 안팎이지만, 이 금액에는 ‘평균의 함정’이 숨어 있다. 대농과 소농 사이 면적 격차가 엄청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농민들이 평균에 못 미치는 직불금을 수령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15년 논 면적조사에서 나타난 숫자들을 다시 직불금으로 환산하면 분배의 불공평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6ha 미만 농가집단의 평균 재배면적은 농가당 0.3ha로 고정직불금 액수(ha당 100만원)로 바꿔보면 농가별로 30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현재 기초 지자체들이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 자체예산으로 힘겹게 시행하고 있는 농민수당의 연간 수령액(60만원)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전체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농정으로 취급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해 지급된 쌀 고정직불금이 총 8,422억원이고, 그중 ‘소농’들이 받아간 액수는 약 1,200억원 수준에 그친다. 공익형직불제 도입과 맞물려 언급된 ‘소수의 대농이 8할이 넘는 쌀 고정직불금을 쓸어간다’는 이야기는 전혀 과장이 아닌 셈이다. 당시 기준으로 재배면적 6ha 이상의 소위 ‘대농’들이 쥘 수 있는 쌀 고정직불금은 평균 700만원 선을 넘는 수준이다.

직접지불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집단의 1인당 농업보조금은 최상위급 농업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선진국들이 모여 있다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평균(4,014달러, 2013년)보다는 이미 훨씬 우위에 있었다. 소농들에게 지급되는 논·밭 고정직불금(2019년 기준 ha당 논 약 80~107만원, 밭 약 52~70만원)이 사실상 의미 없는 수준의 예산인 것을 생각하면, 직접지불제는 규모화 농가만을 대상으로 한 농정이라 할 수 있으며, 농가들의 재배면적 확장을 유도하고 그 과정에서 도태된 농민들이 농업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규모화에 성공한 농가는 소규모 농가에 비해 최대 수십 배에 이르는 직불금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쌀 전업농으로써 각종 보조사업에 더 나은 접근성을 가지는 반면, 대부분 임차농지에 의존하는 소농들은 응당 받아야 할 소액의 직불금마저도 지주들에게 빼앗기는 통에 시간이 갈수록 농가 간 소득격차는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6년 기준 농가 1분위 계층 대비 5분위 계층의 소득이 11배를 넘겼다.

우리 정부는 직불제도의 실패를 인정하고, 개발도상국 지위를 이용해 농민들을 보호하고 가족농업을 육성할 시간과 명분이 충분했지만 끝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개도국 지위 자진포기 사태 이후 김현권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가 개도국 자격으로써 쓸 수 있는 농업보조금 규모 약 195조8,000억원 가운데 불과 15.5%만 집행했으며, 연별로 따져보면 보조금에 들어가는 예산은 매해 감소하기까지 했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기 이전부터 이미 중소가족농을 배제하는 농정이 의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우리 체질에 맞지 않는 선진국형 농정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농식품부 입맛에 맞는 농업구조를 취하려 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최근에는 프랑스, 독일 등 우리보다 훨씬 농가 수가 적고 1인당 평균 재배면적이 많은 나라들조차 농가 간 불균형, 청년농민 유입 감소, 생물다양성 상실 등을 이유로 EU의 CAP를 재고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이다.

많은 모순들이 오랜 시간 지적돼 왔음에도 직불제와 그 폐단들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고, 농민들은 농가인구 감소를 지켜보고만 있는 농정당국을 향해 ‘살농정책’이라는 구호를 외친지 오래다. 현 집권여당의 ‘공익형직불제’ 또한 이러한 대내외적 배경과 요구 속에서 등장했지만, 면적 단위 직불제라는 토대는 상당부분 그대로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소농에게 더 돌아갈 거라는 직불제 예산 또한 크게 증가하지 않아 중소가족농을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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