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농촌에서 땅을 터전삼아 농사짓고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는 예로부터 ‘농민’이라 불러왔다. 하지만 오늘날 국가는 이들 농민을 ‘농업이라는 산업에 종사하는 주체’라는 사무적인 관점에서 ‘농업인’, ‘농업경영체’라 칭하고 있다.
농업인은 농민과 온전히 같지 않다. 그저 농사지으며 살아가기만 해선 안되고, 법률에 따라 △1,000㎡(300평) 이상을 경작하거나 △연간 120만원 이상의 농산물을 판매하거나 △연간 90일 이상을 농업에 종사해야 농업인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
실제 농사짓는 농민이라면 번거로울지언정 ‘농업인’까지 가는 길은 큰 장애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농업인’에서 ‘농업경영체’로 가려면 농지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농업경영체로 등록하려면 우선 농업인 자격이 필요하고, 반드시 1,000㎡ 이상의 농지(시설 및 축사는 별도기준)를 경작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대부분이 ‘농업경영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직불금부터 시작해 각종 보조금과 유류·전기세 혜택, 국민연금·의료보험 감면, 농협 조합원 가입이나 농자금 대출에도 농업경영체 등록이 필요하다. 농업경영체가 되지 못한 농민은 정책에서 완전히 소외된다.
1,000㎡ 면적기준이 작아 보여도 현실에선 큰 장벽으로 작용한다. 임차농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주 입장에선 농지를 임대 놓더라도 명의를 자기가 갖고 있으면 정책 수혜를 유지할 수 있고, 8년 자경 인정 시 농지 양도소득세까지 감면받을 수 있다. 때문에 농지 임대차 현장에선 부실계약이나 구두계약, 부분계약 등이 횡행한다. 명의를 자기가 갖는 대신 임차인에게 응분의 혜택을 주는 지주도 많지만, 농정의 맹점을 개인의 양심이나 그 지역의 풍조에 맡겨야 하는 위태로운 구조임이 분명하다.
이는 젊은 귀농인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지는 문제다. 승계농이 아닌 젊은 귀농인들은 농지를 구입할 재력이 없고 지역 농민·지주들과의 ‘관계’도 부족하다.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사는 “통계엔 잡히지 않지만 경영체 등록을 못하는 젊은 귀농인들이 적지 않을 거라 본다. 다행히 마음 좋은 분을 만나 임대차 계약을 제대로 하거나, 돈을 많이 모아와 땅을 사지 않는 이상 경영체 등록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박기윤 화천귀농학교장도 “귀농 진입장벽 중 제일 큰 게 농지다. 임차는 했는데 법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경영체 등록을 못 하게 되면 청년창업농 지원자금을 받는 데도 문제가 생긴다”고 안타까워했다.
임차농만이 전부는 아니다. 농업 일용직에 종사하는 고령농민 가운데 드물게 1,000㎡의 자경농지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엄연히 농업 생산현장을 책임지는 농민임에도 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면적기준과 상관없이 농업정책의 혜택이 생계급여나 노인기초연금보다 적어 스스로 경영체 등록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농업경영체가 아닌 농민’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파악할 길이 없다. 단순히 농가수에서 농업경영체 등록건수를 빼면 될 것 같지만 2018년 말 기준 농가수는 102만838호, 농업경영체 등록건수는 165만8,627건(농업법인 제외)으로 오히려 농가수보다 농업경영체 등록건수가 더 많다. 정책사업 수혜를 위한 ‘경영체 쪼개기’ 편법이 성행하면서 정상적인 파악이 불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파악을 위한 별도 조사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정책의 출발은 대상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 농정은 농업 종사자를 ‘농업인’과 ‘농업경영체’라는 틀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실제 농촌을 살아가는 농민들 개개인을 놓치고 있다. 특히 비록 공동경영주 등록의 길이 활짝 열렸다지만 경영체 위주의 정책설계 아래 아직도 여성농민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농정은 그동안 규모화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흘러왔으며 정책 대상인 ‘농업경영체’는 농민들을 온전히 아우르지 못했다. 울타리를 벗어난 이들의 상당수는 여성과 영세농·청년농·임차농 등 실질적으로 농촌의 가치를 분담하고 있는 중요한 주체들이다. 나날이 대농보다 중소농, 경제보다 가치에 집중하고 있는 선진국들의 농정에 비해 우리 농정은 아직 모호한 정체성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