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수당 도입, 지자체 몽니에 ‘절반의 성공’

'[2019 농업결산] 농민운동
막지 못한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여성농민 전담부서 신설

  • 입력 2019.12.22 13:34
  • 수정 2019.12.22 23:03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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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0일 전남 무안군 전남도의회 앞에서 열린 ‘도민 무시, 민주주의 파괴 전남도의회 규탄과 도의회 방청권 발부 촉구 도민대회’에서 농민들이 농민수당 조례안 처리가 예정된 본회의 방청을 제한한 도의회를 규탄하며 ‘도민무시 도의회’가 적힌 상여를 반납하고 있다.한승호 기자
지난 9월 30일 전남 무안군 전남도의회 앞에서 열린 ‘도민 무시, 민주주의 파괴 전남도의회 규탄과 도의회 방청권 발부 촉구 도민대회’에서 농민들이 농민수당 조례안 처리가 예정된 본회의 방청을 제한한 도의회를 규탄하며 ‘도민무시 도의회’가 적힌 상여를 반납하고 있다.한승호 기자

끝없는 확산세, 그러나 예정된 ‘벽’

‘농민수당’은 이제 농업을 하는 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 됐다. 농민수당 추진운동은 2018년 12월 21일 전남 해남군의회가 전국 최초로 농민수당 지급 조례를 의결하는 성과를 내며 가능성을 품었다. 농민수당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원년이 바로 지난해였다면, 올해는 그 당위성을 다져 하나의 농업정책으로 만들어보려는 시도가 시작된 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농민들은 농민운동이 활발한 특정 지역에서 거둔 국지적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이를 국가 농정으로 만들고자 했다. 광역 지방자치단체로 하여금 관내 전체에 농민수당을 시행하도록 만드는 것은 자연스레 그 완성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두 번째 발판으로 여겨졌다.

최초의 시도는 역시 전라남도였다. 전남 농민운동 진영은 이전 해의 운동과는 다르게, 입법 권한을 가진 지방정부나 도의원들을 설득하는 대신 직접 농민수당 시행의 근거가 되는 조례안을 만들어 제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지방자치법에서 보장하는 주민의 조례 제정 청구권을 이용한 것이다.

청구에 요구되는 주민 수 확보가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지역 여론이 농민수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해남 이후에도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농민수당 시행에 동참하는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줄을 잇고 있었던 상황이 농민들의 확신을 뒷받침했다.

올해 전남도의 19세 이상 주민총수는 157만6,735명이고 이 중 100분의 1인 1만5,769명의 서명을 받아야 조례 제정 청구가 가능했지만, 조례 청구 운동을 추진했던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과 민중당 전남도당은 지난 6월부터 약 45일 간 하한선을 훨씬 뛰어넘는 4만3,000여명의 서명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뤘다.

조례 제정 청구는 ‘농민 스스로 만든 농정’이라는, 그야말로 농민수당의 성격에 걸맞은 수단이기도 했지만, 지난해 확산되는 요구에 전남도가 자체적으로 내놓은 계획을 농민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도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 농민들은 기초 지자체의 예산이 가지는 한계 등 현실적인 이유로 시·군 단위에서는 넘지 못했던 벽을 광역 시행에서는 허물어보고자 했다.

재원의 문제로 최초 농민수당의 지급액수는 연 60만원 수준에 그쳤고, 농민 단위가 아닌 경영체 등록 기준의 농가 단위로 지급해 여성농민들로부터는 ‘농가수당’이라는 오명으로 불렸다. 지난해 농민들은 지자체들의 열악한 상황을 고려, ‘어쨌거나 농민수당이 결국 시행된다’는 상징성에 가치를 두고 타협했지만, 국가 농정의 발판이 될 광역 농민수당에서는 결코 양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농민수당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기면 필시 본질이 훼손될 거란 우려가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은 우려했던 수준보다 훨씬 잔혹했다. 본회의를 연 전남도의회는 농민수당 시행에는 동의했지만, 도지사에 농민수당의 전권을 일임하도록 일방적으로 내용을 바꾸며 도 농정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농어민 공익수당’의 의결 당일 도의회 청사는 경찰병력에 의해 봉쇄돼 주민 조례 청구 제도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 전북도의회에서는 ‘전국 최초 시행’을 위해 약 3만 명이 참여한 주민조례 청구가 무시된 채 도 제출안이 우선 처리됐다. 도의회 내부에서도 ‘이렇게 급박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라 심도 깊은 논의가 먼저 필요한 사안’이라는 이의제기가 나왔지만,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당 출신 의원들의 압도적 찬성표로 사실상 묵살 당했다.

농민수당의 광역시행은 결국 현실이 됐지만,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민의를 보호하지 못하는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진보’는 일어나지 못했다. 전남 농민운동 진영 일각에서는 관료사회의 경직성을 생각하면 차라리 시행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도 평한다.

문제는 내년에도 비슷한 일들이 계속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뒤이어 운동을 펼치고 있는 지역에서도 의원들이 주민 조례안을 무시하고 유사조례를 발의하거나(충남), 단체장이 농민수당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계획을 내놓는(충북) 등 이미 징후가 감지되고 있지만 주민인 농민들 입장에서는 제도적 미비 때문에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농민수당’과 ‘농민기본소득’으로 방향이 엇갈리는 것 또한 동력을 제한하는 새로운 요소로 떠올랐다.

트랙터까지 다시 한 번 나섰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협상조차 없이 ‘알아서’ WTO 개발도상국 지위(농업부문)를 내려놓는 우리 정부의 모습은 올해 모든 농민들의 분통을 터지게 만들었다. 농민단체들은 공익형직불제에 대한 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와중에도 모처럼 한 몸으로 대응했으며, 이는 지난 2017년 한-미 FTA 개정협상 당시 공동대책위가 결성된 이후 2년 만에 재현된 모습이었다.

국민과함께하는농민의길과 한국농축산연합회는 각각 광화문과 국회 앞에서 전국농민대회와 전국농민총궐기대회를 열어 강력한 반대의지를 표명했으나, 이를 추진하는 기획재정부는 물론이고 농림축산식품부에서조차 공식적인 사과나 양해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쌀생산자협회 등 진보진영 농민단체들은 지난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촛불혁명 시기 이후 처음으로 아스팔트에 농민들의 트랙터를 내보내 더 이상 농정당국과 이른 바 ‘촛불정부’에 일말의 신뢰조차 남아있지 않음을 강하게 표현했다.

지난 10월 25일 ‘WTO 개도국 지위 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소속 농민단체 대표들이 상복을 입은 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정부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입장에 항의하며 규탄행동에 나서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0월 25일 ‘WTO 개도국 지위 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소속 농민단체 대표들이 상복을 입은 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정부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입장에 항의하며 규탄행동에 나서고 있다. 한승호 기자

여성농민운동 30년에 다시 얻은 전담부서

여성농민들의 숙원이었던 소위 ‘여성농민 전담부서’가 올해 신설됐다. 지난 7월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촌여성복지과’에서 ‘농촌여성정책팀’을 분리·신설하기로 결정하면서 전담부서가 재탄생했다. 이는 여성농민들이 기나긴 투쟁을 통해 전담부서 설치를 요구한 결과다.

여성농민들은 지난 2017년 우여곡절 끝에 의원들을 통해 전담부서 설치에 관한 내용을 담은 여성농어업인육성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본회의에는 상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농식품부와 끈질기게 접촉한 여성농민들은, 결국 올해 농식품부가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그 팀장으로 공무원이 아닌 외부인을 공개 채용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전담부서 자체가 처음 생긴 것은 아니다. 지난 1998년에도 여성농민운동의 결과로 당시 농림부 내에 ‘여성정책담당관실’이 신설됐지만 ‘과’로 축소된 뒤 또 다시 다른 과와 병합되며 독립적 기능을 상실했다. 그 뒤 20년 만에 비록 ‘팀’ 단위로나마 부활한 것이다.

2019년은 여성농민운동을 이끌고 있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 의미를 더했다. 또한 부서의 신설을 넘어 기대할 만한 인사도 동반됐는데, 그 팀장에는 여성농민의 처우개선을 위해 오랜 시간 애써온 현장 전문가 오미란 전 젠더&공동체 대표가 임명돼 전여농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농민단체들이 환영의 뜻을 표했다.

여성농민들은 현재 6명에 불과한 팀의 규모를 더욱 확대해 완전한 정책과제 수행이 가능한 수준으로 부서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각 지자체에도 전담부서가 설치될 수 있도록 거듭 촉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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