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8회(끝)] 해방과 분단-남한

  • 입력 2019.12.22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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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1945년 8월 10일, 일제는 미국에 항복 의사를 전달한다. 미국은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고 일본의 항복 조건이 담긴 ‘일반명령 1호’가 작성되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 중에는 한반도를 비롯한 극동지역에 관계된 부분이 있었다. 갑작스런 소련의 참전과 이미 두만강을 건넌 상태에서 이 급박한 임무는 한반도라는 곳을 들어본 적도 없는 두 명의 미군 대령에게 맡겨졌다. 훗날 케네디 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된 딘 러스크와 주한미군 사령관이 돼 최초로 삼팔선에 철조망을 둘러친 찰스 본스틸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지도를 펼쳐놓고 단 30분 만에 38선을 직선으로 그었고 이를 곧바로 보고하였다. 이 어이없는 과정이 38선 탄생의 전부였다.

미국은 소련에게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을 나누어서 점령하자는 제안을 했고 소련은 이를 즉시 받아들였다. 이상하게도 두 나라 모두 38선에 대만족이었다. 소련으로서는 한반도를 절반이나 차지할 의도가 없었던 터라 놀랐고 미국은 이미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소련이 절반에 만족한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 이때 한반도에서 제일 가까운 미군은 1,000킬로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이처럼 우리의 분단은 미국과 소련이 일사천리로 순식간에 합의한 결과였다. 전범국인 일본을 대신하여 식민지였던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해방 직전에 총독부는 가장 신망 받는 지도자라 여긴 여운형에게 해방정국에서 일본인들의 무사귀환을 위한 치안유지권을 맡긴다. 이미 한 해 전에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전국에 7만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던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8.15 당일에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즉시 해방정국을 주도해나갔다. 물론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곧이어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자주적인 국가 건설의 노력을 모두 부정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국내에서는 건준과 가장 큰 세력인 사회주의 계열 운동가들이 해방 직후부터 조직을 정비하며 회오리치는 정국에 대응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괴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8월 18일에 여의도 비행장에 비행기 한 대가 착륙했다. 미군이 대여해준 이 비행기에는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광복군 대원들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에 광복군들은 내리지도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직 철수하지 않은 일본군들이 발포하겠다며 위협을 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한 해방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맥아더와 이승만.
맥아더와 이승만.

건준과 사회주의 계열, 임정을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등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던 9월 8일, 인천항에 미군이 상륙했다. 그리고 즉시 군정을 실시할 것을 선포하고 육군 소장 아놀드가 군정장관으로 취임했다. 미국은 일본 점령을 대비하여 민정관을 2,000명이나 양성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단 한 명의 민정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 중 가장 고위급인 하지 중장이나 부하인 아놀드나 한반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미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있었다. 점령한 지역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기에 한반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 중에 미국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맛에 딱 맞는 사람을 찾았으니 그가 바로 이승만이었다. 미국은 그를 임시정부의 미주대표 자격으로 비행기에 태워 귀국시켰다. 10월 12일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보다 한참 늦은 11월 23일에 귀국했다. 이승만이 임정 대표 자격인 데 반하여 임정요인들은 모두 개인 자격이었다. 미국이 임시정부의 자격으로는 절대 입국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탓이었다.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을 낙점한 것처럼 미국은 이미 이승만을 점찍었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라는 운명이 한반도를 덮쳤다. 치열했던 해방정국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두고 각 정치세력이 이합집산과 투쟁을 벌인 것이었고 결국 전쟁으로 치달아 지금까지 분단된 한반도에 우리가 살고 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연재가 종료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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