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88] 조각돌

  • 입력 2019.12.22 18:00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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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윌리엄 썸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은 써밍업(The Summing Up)에서 인생을 조각돌에 비유했다. 큰 바위를 쪼개면 예리한 조각돌이 많이 나오는데 이 돌들을 자루에 넣고 오래 흔들면 조각돌의 예리한 각들이 서로 갈려 나중에는 둥글둥글한 조약돌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세월이 지나며 인생의 예리한 각은 사라지고 둥글둥글해진다는 것이 썸머셋 모옴의 시각이다.

대학시절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공감했었던 기억이 난다. 젊은 날 품었던 우리 사회와 시대에 대한 날선 비판과 분노도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저런 모난 것들에 부딪히며 무뎌 진다는 것이었고, 나라고 별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했다.

1970년대 초 그러니까 내가 20대 초반의 대학생 시절엔 사회에 대한 반감과 저항이 컸던 시대였다. 그렇다고 나는 반독재나 반정부 같은 이념 지향적 저항은 아니었고 고단하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 삶에서 오는 사회에 대한 막연한 저항과 분노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런 모가 난 내 자신이 싫었다.

철이 조금 들 무렵부터 나는 우리 집이 이토록 입에 풀칠하기 조차 어려울 만큼 가난한 이유가 일제강점 시절 항일운동하다 옥사한 나의 큰아버지(윤재형)로 인해 가족 전체가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라는 가족사를 알게 됐다. 독립유공자 집안이었지만 그 후손인 우리는 이토록 힘들게 살고 있는데 친일파의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납득되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젊은 시절 나는 한 많은 모난 조각돌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조각돌 기질은 30여년의 교수생활 내내 좌충우돌하는 삶을 살아오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농업경제학자로서 농업·농촌·농민 문제를 연구했다고는 하나 우리의 농업은 개방화 시대에서 점점 살아남기가 힘들어지고 있고, 우리의 농촌은 점차 소멸의 위기로 치닫고 있으며 우리의 농민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있으니 내가 살아 온 학자로서의 삶은 늘 자괴감이 들고 불만족스러웠다. 우리 사회와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농업·농촌·농민에 대한 몰이해와 저급한 인식수준은 늘 안타까웠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 현역에서 은퇴한 지금, 우리 사회나 정부가 농업·농촌·농민을 홀대하던 말던, 죽이던 살리던 내 할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굳이 나서서 반대하고 비판하고 적대시 할 필요가 있을까. 좀 둥글둥글하게 살면 안 될까. 평생 함께한 아내도 이젠 좀 둥글둥글한 조약돌처럼 살라고 권면한다. 은퇴 후의 안락한 도시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귀농·귀촌한 이유도 아마 좀 둥글둥글해지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귀농·귀촌 4년차를 마무리 하는 2019년 12월 현재, 나는 아직도 모난 조각돌인 것 같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는 성격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밖으로 표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혼자 분노하고 개탄하는 것이 전부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데 그게 나는 잘 안 된다. 수양이 덜 되서기도 한 것 같고, 내 스스로 옳지 않은 것에 대해 타협하거나 이해해 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기 때문인 것도 같다.

써머셋 모옴의 시각처럼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쯤 이리저리 잘 어울리며 둥글둥글 살아야 되는데 난 지금도 그게 잘 되질 않는다. 새해에는 좀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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