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여성농민, ‘전여농’이라는 기관차

  • 입력 2019.12.08 21:03
  • 수정 2019.12.08 21:04
  • 기자명 오미란 (전)젠더 & 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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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오미란 (전)젠더 & 공동체 대표

책꽂이에 유난히 눈에 띄는 책이 한 권 꽂혀 있다. 전남 순천시 문해교실 할머니들의 자서전을 구술한 책이다. 책의 제목은 ‘내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더냐’였다. 제목부터 참으로 맛깔스러웠다.

지난 30년 동안 여성농민운동은 투쟁의 자양분은 풍부했지만 여성농민들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고 홍보하는 일은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책을 보면서 우리는 인생을 알고 있을까? 모든 회원들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가야할 목표지점을 인식하고 함께 걸어가고 있을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전여농 30년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어디를 향해 가야 하고 어떤 목표를 이뤄야 하는지를….

교육, 공동목표를 향한 항해의 나침판

조직은 공동의 목표를 향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서 성장한다. 전여농의 목표는 정관 제2조에 ‘여성농민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지위향상과 민족자주, 민주사회, 조국통일실현을 통해 여성농민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문제는 인간다운 삶의 모양이 어떤 것인가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여성농민운동론이다. 운동론의 내용이 반영된 것이 전여농이 펼치는 사업이다. 전여농은 여성농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주적 조직건설, 교육, 투쟁, 통일사업, 식량주권 실현, 성평등, 정치세력화 등을 표방하고 있고, 이의 실현을 위해 국내외 연대사업을 실행하는 것으로 사업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조직의 공동목표가 무엇이고, 어떻게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와 인식을 모아가는 과정이 교육과 토론회이다. 교육은 특정 조직의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투쟁과 더불어 중요한 수단이면서 도구이다. 투쟁이 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면, 교육은 스스로의 인식과 지향을 확인하고 신뢰하는 내적인 신념을 만들고 공유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교육이나 토론회 등을 통해서 구성원들 간의 신념의 공유나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이정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조직의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조직에서 교육과정은 매뉴얼화 되어 추진되고 수정되면서 조직의 발전과 구성원들의 변화에 맞춰서 변화해 나간다.

전여농이 하나의 방향을 보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마을교육, 시·군 활동가 교육, 도단위 활동가 교육, 전여농 간부교육, 신규회원 교육, 중간간부 교육 등 조직의 성장 계획을 추진할 지침이 구축돼 있어야 한다.

30년 동안 전여농은 ‘자주적 여성농민운동’이라는 기치를 걸고 달려왔다. 조직을 만드는 초기에는 자주적 여성농민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과 설득, 그리고 전 조직원들의 학습과 토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주적 여성농민운동이 무엇인지를 잘 논하지 않는다.

30년의 나이가 먹으면서 전여농이라는 몸통에 새겨진 생각과 실천, 전여농의 규약과 사업안에 자주적 여성농민운동이 녹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성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시점이다. 눈뜨고 일하고 먹고 자고… 이런 일상처럼 대의원 총회하고, 교육하고, 투쟁하고, 해외연대하고, 또 쌀 투쟁하고… 이제는 잠시 멈춰서보자.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제대로 가기 위해서 항해의 나침판을 확인하고 다시 돛을 올려 긴 여정을 떠나야 한다.

지난 8월 23일 서울 강서구 KBS 아레나홀에서 열린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30주년 기념식에서 여성농민들이 각 시·군여성농민회 깃발을 흔들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8월 23일 서울 강서구 KBS 아레나홀에서 열린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30주년 기념식에서 여성농민들이 각 시·군여성농민회 깃발을 흔들고 있다. 한승호 기자

멀리 가기 위해 잠시 멈춰 지나온 길을 돌아봐야

사람도 살아가면서 시련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어떤 이들은 건강이 안 좋아서, 혹은 예기치 않는 사고로, 또는 뜻하지 않는 귀한 인연들로 인해서 변화의 지점들을 마련한다. 말하자면 모든 변화에는 동기와 더불어 적절한 시점이 작용하고 있다.

전여농에 전환점은 언제였을까? 30년을 달려오는 동안 매순간이 전여농에게는 전환점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2003~4년, 2009~10년 두 번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 같다. 첫 번째는 투쟁이 확대되고, 투쟁방식이 변화하고, 객체에서 주체로의 확실한 대변환기로 2003년부터 시작된 투쟁과 해외투쟁, 연대의 확대, 진보적 여성운동과의 연대, 정치세력화 등 전여농의 정치력과 투쟁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시기이다.

다음 시기는 2009년 이후 구체화된 식량주권운동으로서 대안적 실천인 생산자 협동조합 운동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장의 변곡점에서 양질 전환의 변증법을 실현하는 변화, 정치세력화, 전 세계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던 전여농의 전성기, 그 시점에 부족했던 부분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성장하느라 놓친 것은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 찾아내고 그것을 복원하는 과정이 전여농의 또 다른 성장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2006~7년에 전여농은 2년에 걸쳐 조직진단을 위한 시·군간담회를 진행했다. 당시 조직진단 결과 시·군여성농민회 강화를 위해 갈수록 많은 역할을 부여받는데 반해 간부역량의 취약, 중앙의 위상이 높아지는 만큼 시·군여성농민회의 지역 내 정치적 위상이 높지 않은 문제, 회원 확대, 조직의 대중화가 정체되고 있는 것 등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해서 핵심활동가, 주체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이를 위한 과제로 간부들의 단결과 성장을 위해 학습소모임을 운영하고, 월례회나 회의를 통해 일상적인 교육과 집중교육을 강화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투쟁이나 텃밭, 꾸러미 등은 확장됐지만 정작 조직의 골간을 다지는 교육, 토론회, 사상적 단결은 당면과제로 전면에 내걸려 있지 못하다.

30년 전 아이를 업고 전국을 뛰어다니던 활동가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조직의 실무적인 뒤치다꺼리를 전담하고 있다. 다만 그녀들을 부르는 명칭이 달라졌을 뿐이다. 간사에서 총무로, 총무에서 사무국장으로, 사무국장에서 사무처장으로… 계속 명칭이 바뀌는 동안 세월이 흘렀다. 새로운 젊은이들은 가뭄에 콩 나듯 충원되고, 나이 드신 분들은 이제 전국대회에 참석하는 것조차 버거운 실정이다. 무엇이 전여농의 최상의 과제일까? 사람이다. 조직의 재생산과 미래를 만들어가고 이끌어갈 사람. 멈춰 서서 새로운 얼개를 어찌 짜야할지 돌아보자.

무엇을 해야 할까? 사람이 희망이다

전여농은 지난 30년 동안 성장을 위해 힘겹게 한 계단 한 계단 전진하고 있다. 농업·농촌을 둘러싼 계급적 문제를 넘어서서 분단 청산을 위한 통일, 농촌의 가부장성을 타파하기 위한 성평등, 그리고 미래 국민먹거리의 대안을 위한 식량주권까지 하나도 손에서 놓치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2010년 이후 전여농의 실천은 구체적으로 여성농민이라는 생산주체로서의 실천방안을 마련하여 토종씨앗을 키우고, 보급하고, 식량을 생산해 음식으로 나누는 일련의 과정을 전개하면서 노인의 지혜에서 배우고, 젊은이들의 창의성으로 농업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 일을 함께할 후계세대가 재생산되지 못한다면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겨울 것이다. 그래서 함께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 사람은 두 가지 영역에서 관계 맺기가 이뤄져야 한다. 하나는 농업의 후계세대를 이어갈 청년여성농업인(귀농·귀촌, 다문화 포함)의 조직화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으로 함께 식량주권을 지켜갈 국민을 우리 곁에 묶어 세워야 한다.

사람이 농업의 희망이다. 우리의 뒤를 이어 농사지을 사람과 우리와 함께 식량주권을 지킬 사람, 이들이 농업의 희망이다. 농촌의 비전을 어렵게 말하지 말자.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농업의 미래, 농촌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전여농은 이제 멈춰 서서 사람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무엇을 할지 머리를 맞대고 찾아나서야 한다. 단순한 꾸러미, 경제사업이 아닌 사람사업을 통한 지속가능한 성장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

2012년 이후 정치세력화의 꿈이 깨지면서 진보세력의 분열은 전여농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농민헌법, 농민수당, 행복바우처 확대, 언니네텃밭 협동조합 건설 등 전여농이라는 기관차는 나아가고 있다. 거리에서, 논밭에서, 강의실에서, 토론회장에서 전여농의 땀과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1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미투(ME TOO)’가 전여농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동안 전여농이 취약했던 성평등 사회를 향한 발걸음도 전북의 성평등 강사단 교육, 경남의 성평등 강사단 교육, 나주의 성평등 강사단 교육 등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또 하나의 변화는 자여농 교육이 최근 다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여농은 1991년 이후 논의가 확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여성농민운동에 대해 자여농의 근본적인 원칙에 맞게 다시 토론하고,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비전을 세우고, 실천을 공유하는 나눔터

조직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교육과 더불어 선전 홍보매체이다. 홍보매체는 타인을 향해 우리가 하는 일을 선전하고 설득하고 합의를 얻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조직원들 내부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매체이기도 하다. 전여농은 조직 출범 초기부터 ‘여성농민’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다. ‘여성농민’은 한때 발행이 중단되고 정세동향으로 발행됐다가 2011년 다시 ‘세상을 바꾸는 여성농민(세바여)’이란 이름으로 재발행되고 있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세바여는 구성에서 여성농민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기획기사, 즉 분석형 자료가 적다는 점이 과거 여성농민과 차이점이다. 문제는 배포이다. 발행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활용한 학습모임이나 정세공유 등 후속작업의 연계성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나아가기 위해서 정세의 공유와 학습을 통한 인식의 통일은 가치지향적인 조직의 생명이다.

요즘은 소통과 학습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전여농도 예외가 아니다. SNS의 등장은 전여농의 투쟁과 정보의 공유를 실시간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정보도 카톡으로 전달되고, 유튜브를 통해서 영상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날마다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활동과 투쟁을 담은 인증샷이 올라온다. 놀라운 변화이다.

또 다른 변화는 한국농정신문이라는 언론매체를 통해서 여성농민 관련 의제를 기획기사로 다루는 등 시의성을 반영한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여성농민들의 연대와 투쟁이 차량부착 스티커, 인증샷, SNS 등을 통해 전 세계로 확대되기도 한다. 전여농은 ‘공부하는 여성농민이 아름답다’라는 카페를 마련하는 등 공부 소모임을 다시 제기하고 있다.

서른 전여농, 긴 시간을 단축해서 표현하는 것은 때론 비약과 지나친 생략을 하기도 해서 위험스럽다. 혹여 미약한 부분이 있었다면 지면을 통해서 완곡한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서른 전여농을 쓰면서 혼자서 가슴이 먹먹해져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 여성농민가를 부르기도 하고, 그런데 막상 마지막회를 쓰니 아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남는다.

서른 전여농, 전여농이 자랑스럽다. 우리가 자랑스럽다!

이번호를 끝으로 ‘오미란의 한국여성농민운동사’ 연재를 종료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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