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쪽수

  • 입력 2019.12.08 18:00
  • 기자명 김현희(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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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경북 봉화)
김현희(경북 봉화)

“암만 까불어도 쪽수는 못이겨….”

얼마 전 끝이 난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 주인공 대사가 생각난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어도 악인보다는 선한 이웃이 더 많음을 느꼈다. 약하고 가는 작대기도 여러 개가 모여 함께 치면 큰 힘이 생기는 법인데 농민들은 쪽수도 모자라니 무엇으로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농업정책의 방향에 대해 논란이 많다. 정부에서는 WTO 개도국 지위 포기와 함께 공익형직불제로 방향을 틀었고, 며칠 전 전국농민대회에서 농민들은 개도국 지위 포기와 더불어 현 정권의 농업정책 부재와 공익형직불제 개악에 맞섰다.

나는 농업정책의 방향이 이제 대농중심에서 중소농 중심으로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재의 농촌은 70대 이상이 50%를 넘어가고 이대로라면 10년 후, 20년 후면 소멸되고 없어지는 지역도 많아질 것이다. 젊은이가 없고 미래가 없다. 이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현실은 어떤가.

현재 농업 관련 보조사업은 수백 개 이상으로 세기도 어려울 만큼 많다. 적게는 박스 지원, 농자재 지원, 농약, 퇴비보조, 농기계, 시설보조 등 농사 전반에 수많은 지원 사업들이 각 면사무소 부서별 직원들의 서류철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우리 같은 작은 농가에서는 몇 만원, 몇 십만원을 지원받기 위해 몇 십 킬로미터 거리를 기름 태워가면서 군청 드나들고 서류하고 뭐하고… 그냥 포기하고 만다. 박스나 포장자재는 최소단위가 1,000장부터 수만장이니 소농가에서는 엄두도 못 내고 큰 농가라도 보관을 제대로 못하면 버려지거나 작물이 바뀌면 폐기되고, 다시 보조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농사 시설보조사업도 마찬가지다. 농민이 자재만 가지고 스스로 시설에 노동력을 참여해 같이 할 수 있는데 꼭 지정된 사업자의 계산서가 있어야만 하니 업자의 손에 맡겨야만 지원이 된다. 농민 지원사업이라지만 농민보다 업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형국이다. 실제 작은 규모의 소소한 시설은 지원받지 않고 중고 자재라도 구입해서 농민이 자기 품으로 지으면 더 좋은 경우가 많다.

대자본을 투자하는 스마트팜을 권장하지만 10년도 못가서 빚과 껍데기만 남을 거라는 현장의 목소리는 그동안 농민들이 습득한 쓰디쓴 경험의 소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많은 지원정책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고, 농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예산은 몇몇 농업경영인의 자산 부풀리기와 엉뚱한 개발업자와 장사꾼의 이득으로 끝이 나고 만다.

농산물 가격은 바닥을 치고, 무엇을 심어야 할지도 몰라 우왕좌왕하는 농민들에게 당근과 채찍으로 길들이기는 이제 그만두라 말하고 싶다. 우리 농업은 이미 길을 잃었고, 농업정책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

손수 집을 짓고 나무를 깎고 기계를 손보고 장작을 패고, 농약 없는 농사를 짓느라 손으로 벌레를 잡고 풀을 뽑고, 평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들을 운명처럼, 때론 기적처럼 만들어가며 자본의 논리에 기대지 않고 담담하게 살아가는 농부들도 있다. 주로 뭘 먹고 사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 농민들이다. 뭘 먹고 사느냐,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답은 기본소득이다.

농민기본소득 실현은 소농도 중농도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농업·농민의 공익적 가치를 존중하고, 조건없이 농민 개개인에게 현금으로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농민기본소득을 실시해 농민들 스스로가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고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도시에는 청년들과 저소득층이 집이 없어 비싼 월세에 밀려 거리로 나서고, 농촌은 학교가 비어가고 빈집이 속출하고 사람이 없는 황폐한 들과 산이 됐다. 농업이 살고 농촌이 살려면 사람이 벅적거려야 한다. 청년이 들어오고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야 학교도 살고 시장도 살고 마을도 살아갈 수 있다. 농민기본소득이야말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확실하고 유일한 토대다.

수많은 농민들이 자연과 공존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야말로 ‘쪽수’에서도 밀리지 않는 그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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