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6회] 분단의 서막

  • 입력 2019.12.08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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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카이로회담의 주역들. 장개석(앞줄 왼쪽부터), 루즈벨트, 처칠.
카이로회담의 주역들. 장개석(앞줄 왼쪽부터), 루즈벨트, 처칠.

한반도가 둘로 갈라진 지 70년이 넘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직접적인 원인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승전국으로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온,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의 힘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극이 계속된 것이다. 이 분단의 비극은 이미 일제강점기 말엽에 그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미국이 2차 대전에 본격 개입하면서 연합국 측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데, 그 논의 가운데 하나로 한반도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미국은 1943년 3월 영국 외상 앤서니와 회담을 할 때 최초로 한반도를 언급한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를 일정 기간 동안 미국, 중국, 소련의 3국 신탁통치 아래 두었다가 독립시킨다”라는 자신의 복안을 이야기했고 영국 외상은 이에 대해 동의한다.

해방정국에서 태풍을 일으킬 ‘신탁통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구상한 사람은 루즈벨트였다. 식민지 상태에 놓인 여러 나라들이 갑자기 독립할 경우에 좌익이 정권을 잡을 위험이 높다고 판단한 그는 일정한 기간 동안 소련과 협력하여 신탁통치를 하면서 친미정권을 수립할 여건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최초의 언급 이후 공식적으로 우리 문제가 논의된 것은 그해 11월 이집트에서 열린 카이로회담이었다.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이 모인 3국 수뇌회담에서 발표한 ‘카이로선언’ 3항은 ‘노예 상태에 놓인 한국을 해방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정한다. 일제는 이 소식을 철저히 통제하였지만 단파방송이나 망명인사 등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은 이 선언의 내용을 알게 된다. ‘적절한 시기’라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연합국들이 우리의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은 큰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이 선언에 담긴 조선의 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장개석이었고 이는 장개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가 기울인 성과였다. 임정은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은 즉시 독립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상대가 누구든지 역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탁통치에 대한 김구의 조건반사적인 적대감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전개된 과정을 보면 서구 열강들은 임정의 경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보기에 임정은 중국에 예속된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경에 있던 임정은 재정적, 군사적으로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고 이 상황은 독립된 외교를 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중경이라는 도시 자체적으로도 우리 동포가 거의 없고 임정과 관련된 인사 및 그 가족들 300여명이 전부였다. 어찌보면 중국이 한반도의 지배권을 노리고 임정을 내세워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루즈벨트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일본이 패망한 직후 중국이 내전에 휩싸였고 장개석이 쫓겨 가면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카이로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즈벨트는 이란의 테헤란으로 가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을 만난다. 중국의 장개석이 빠진 채 미·영·소 3국 정상회담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미국의 입장이 관철된다. 루즈벨트는 “한반도가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해 약 40년간의 수습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스탈린 역시 이에 동의했다. 일제강점기보다도 긴 무려 40년의 신탁통치를 거론했던 것이다.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도 한반도 문제가 거론되는데, 여기에서는 2년 전 카이로선언의 내용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되어 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연합국들의 전후처리 문제로 귀결되었고 미국의 구상대로 신탁통치가 이루어질 기능성이 높게 되었다. 해방 후에 엄청난 분열과 결국 분단에 이르게 되는 서막이 이미 일제강점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경 임정의 의정원 의원들. 앞줄 오른쪽 끝에 김원봉의 모습.
중경 임정의 의정원 의원들. 앞줄 오른쪽 끝에 김원봉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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