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가을걷이? 가을거지!

  • 입력 2019.12.01 18:00
  • 기자명 전용중(경기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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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중(경기 여주)
전용중(경기 여주)

추수가 끝나고 농협에 수매한 대금이 입금되면 소작쟁이의 장부정리가 시작됩니다. 농협과 농약가게 외상값, 주유소 기름값, 농기계 수리비를 돌리고 나면 통장은 다시 마이너스를 타기 시작합니다.

외상이 정리되면 다시 도지를 보내야 합니다. 지주에 따라 현금이나 쌀을 보내야 하는데 조금 오른 쌀값에 소작쟁이들 눈치작전이 벌어집니다. 도지를 현금으로 줄 때 쌀 80kg 한가마의 가격을 얼마로 할지 소작인과 지주의 셈법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지주는 많이 오른 마트 소비자가격을 바라고 소작쟁이는 우리가 주로 내는 벼값으로 주기를 바라지만 지역에서 전부터 내려오는 방식은 정미소에서 우리들 쌀을 사는 값이 일반적입니다. 소비자가격보다는 볏값에 눈금이 더 가까운 가격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소작인과 지주 사이의 눈치보기입니다.

이 정도는 정미소에서 만난 이웃동네 소작쟁이들과의 담합(?)으로 넘어가기 쉽습니다.

문제는 소작쟁이 사이의 치사한 눈치작전입니다. 쌀값이 많이 올랐다며 남들보다 1만원짜리 한 장씩 붙여서 보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벌써 내년 농지 전쟁을 시작합니다. 직불금도 못 받으면서 도지까지 알아서 올려주는 경쟁자들 앞에서 직불금 다 받고 도지도 낮춰야 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멍청한 소작쟁이는 해마다 논이 줄어듭니다.

도지까지 주고 나면 통장은 9월처럼 아래로 충만합니다.

아침부터 정미소를 오가며 마을에 쌀도지를 돌리고 남은 양식을 창고에 내리다 말고 소주 한 컵을 마시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뭅니다. 허리도 쉴 겸 잠시 앉아 아무도 듣지 않는 궁시렁을 시작합니다.

“씨××~ 누구 좋으라고 농사를 짓냐… 궁시렁, 궁시렁….”

매년 반복되는 농사일처럼, 소작쟁이 살림은 매년 반복 악화되기만 합니다.

내가 게을러서인가? 혁신적인 농법을 쓰지 않아서인가? 농민회 일 동네 일에 시간이 없어서인가? 그럼 나만 빼고 다른 농사꾼들은 다 잘 사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럴까? 농촌의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데, 빈익빈은 알겠는데 부익부는 누구인가? 무엇을 바꿔야 행복한 노동으로 살아갈까?

늘 고민의 끝은 농지 소유의 문제와 농민 정년의 문제로 정리됩니다.

우리 전국농민총연맹이 꾸준히 주장해 온 최저가격이 보장되고 농민수당이 농민들 살림에 충분히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진전된다면, 우리 농민들은 일정규모 이하의 경영규모를 정하고 노동자들처럼 정해진 나이에 노동에서 해방돼야 하지 않을까요? 정해진 규모와 정년의 안에서 충분한 지원과 국가 농업의 계획을 세우면 농지에 대한 공적 소유와 이용의 길도 열리지 않을까요?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 노동시간을 줄이는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왜 우리 한국의 농민들은 더 많이, 더 오래 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까요?

내 이름으로 된 수만평의 논두렁을 베고 죽으면 행복할까요?

잠시 쉰다는 것이 술기운과 잡생각에 금방 하루가 저뭅니다.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화목보일러 아궁이에 불을 달여 놓아야 씁쓸했던 하루가 지나겠지요.

언젠가부터 1년 농사 가을걷이의 끝이 텅 빈 손 ‘가을거지’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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