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5회] 전쟁의 광기

  • 입력 2019.12.01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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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 당시 모습.
일제의 진주만 기습 당시 모습.

우리는 10년 사이에 두 번의 전쟁을 겪은 민족이다. 수백만이 목숨을 잃은 한국전쟁과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그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이라는 태평양전쟁 중에 우리가 치른 고통은 실로 끔찍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광기에 사로잡힌 한 국가가 얼마나 무모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오죽했으면 전쟁 후에 미국은 일본인이 과연 어떤 존재들인지 파악할 것을 국무성 차원에서 발주하였고 그 결과로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전쟁 직전 일본에서는 일종의 쿠데타가 있었다. 동남아시아를 계속 침략해가는 일제에 대한 경고로 미국이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이에 일본 정부가 타협하려 하자 군부가 일어나 강경파 군인 도조 히데키가 권력을 장악했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은 그 자체로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군인과 민간인 3,000여 명이 죽었고 570대의 전투기 중 470여 대가 부서졌다. 미국은 즉각 전쟁을 선포했고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 역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미국을 포함한 26개국이 연합군을 형성하면서 이미 전개되던 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은 식민지 조선에도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다. 이때부터 징병이 시작되었고 가혹한 전시공출, 징용, 정신대 동원 등이 이루어졌다. 쌀과 노동과 목숨의 세 가지를 일제는 가혹하게 빼앗아갔다. 당시 약 2,300만 정도의 인구 중 징용에 동원된 연인원은 2,000만이었다. 군대 동원은 생각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다. 징집된 조선인 대다수가 일본어를 거의 못했기 때문에 군사작전에 투입하기가 어려웠고 이에 일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병동원령을 내리게 된다. 어쨌든 일제가 조선인을 군인으로 데려간다고 하니까 환호하며 박수를 친 자들이 의외로 많았다. 소위 지식인들이라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인이 황군의 병사가 되는 것은 식민지 백성에서 벗어나 ‘일등국민’이 되는 것이라 여겨 감읍했고 입대를 허락해준 일본 왕을 칭송하기 바빴다.

일제는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호 아래 중국과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전체를 일본을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이에 갑자기 조선에서 열광이 일어났다. 일제의 계획대로 대동아공영이 된다면 가장 오래 식민지를 겪은 조선이 일본에 뒤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의 위상을 가진 민족으로 설 수 있다는 환상이 퍼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조선의 청년들은 다투어 전쟁에 나가야 했고 미국과 영국은 박멸되어야 했다. 실제로 괌과 홍콩, 싱가포르가 연이어 일제의 수중에 떨어지자 그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해방 후에 뜬금없이 ‘아메리카 카우보이’나 ‘샌프란시스코 아가씨’같은 노래가 유행했던 것처럼 동남아시아를 그리는 노래들이 나오고 남방은 자원이 무궁무진한 신세계로 선전되었다. 밀양이 낳은 대중가요의 전설 박시춘은 ‘아들의 혈서’, ‘혈서지원’ 등의 노래를 작곡해 일본의 작곡가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전쟁 첫 해에 일제는 이전의 소학교나 보통학교를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국민이란 황국신민의 줄임말이었고 전시동원 체제를 어린이들에게도 적용한 것이다. 나치독일의 유겐트와 같은 조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데 기상천외하게도 ‘청음교육’이라는 과목을 1학년 때부터 가르쳤다. 일종의 듣기 교육이었는데, 그 목적은 한 번 듣고 적군의 비행기인지 아군의 비행기인지, 혹은 어느 편의 대포소리인지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귀를 레이더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가장 미친 짓은 교쿠사이(玉碎)와 가미가제(神風)였다. 옥처럼 부서져 산화한다는 것은 싸우다 힘이 다하면 자결하라는 것이었고 가미가제는 잘 알려졌듯이 자살폭탄공격이다. 옥쇄와 신풍은 수많은 일본군과 끌려간 조선인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광기어린 일본 제국주의의 기치였다. 인간의 죽음을 영광으로, 나아가 열광으로 부르던 참혹한 전쟁도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1940년대의 국민학교 애국조회.
1940년대의 국민학교 애국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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