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혁명과 계몽의 변주곡

  • 입력 2019.12.01 18:00
  • 기자명 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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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마오쩌둥은 오늘날의 중국을 세운 대단한 정치 지도자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그는 정치적 인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도 그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듯이 오늘날 그의 위상은 신의 영역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중국 사람들은 마오쩌둥의 초상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 택시와 자가용에 걸고 다닌다. 가정집이나 사무실에도 그의 초상이 걸려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몇 천만 명의 인민이 기아로 사망하고 1968~1978년 10년간의 엄청난 국가적 혼란의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의 위대한 업적에 비해 그 과오를 그럴 수 있는 실수쯤으로 받아들인다. 농민혁명을 통해 진시황 이후 중국 대륙을 하나로 통일한 그에게 인민들이 주어준 특별한 형태의 경배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혁명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농민혁명과 신중국 건설 과정에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한 인물이 있었다. 다름 아닌 ‘향촌건설의 아버지' 량수밍(梁漱溟)이다. ‘최후의 유학자’라고도 불리는 그는 베이징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를 하다 거대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과 농민을 개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광둥성과 산둥성 등 농촌 현장으로 들어갔고 농민들과 함께 향촌건설운동에 몰두했다. 농민을 교육하고 농업생산, 신용, 판매 합작사(협동조합)를 만들어 농민의 자립과 자치를 도모했다.

마오쩌둥과 량수밍은 무력하고 부패한 청 왕조를 패퇴시키고 새로운 중국 건설을 갈구했다. 그리고 그 둘은 새로운 중국 건설의 목표를 농촌에서 찾았다. 하지만 둘 간의 중국사회 개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은 오랜 봉건사회의 폐단으로 인한 계급모순, 즉 지주와 비지주 간 계급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농민 중심의 혁명을 위해 농지를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책을 단행했다. 그는 중국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토지의 불평등한 소유로 봤던 것이다. 반면 량수밍은 중국 향촌사회의 계급문제는 중국 고유의 전통이기에 이러한 신분사회를 인정하고 이들에 대한 계몽을 통해 중국을 개조하고자 노력했다. 향촌건설운동을 주도하면서 농민들의 자각과 자립을 촉구했다. 그래서 량수밍은 지주로부터 땅을 강제로 빼앗아 농민에게 분배하는 마오쩌둥의 혁명 방식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강제 토지분배 방식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부른다는 것이다. 실제 마오쩌둥의 토지분배 과정에는 수많은 무고한 지주들의 희생이 따랐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러한 토지분배를 통해 혁명에 성공했다.

마오쩌둥은 드디어 농민혁명을 통해 신중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신중국을 건설하자마자 농민을 배제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도시와 공업을 우선 발전시키기 위해 농민을 희생시켰다. 그래서 량수밍은 마오쩌둥을 만나 그의 실정을 성토하고 정책 수정을 요구했다. 둘 사이 재떨이가 던져질 정도로 격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구의 재침략을 우려했고 그 자신이 서구를 쫓아가는 데 조급한 나머지 공업화를 위한 원시자본의 축적을 위해 농민의 희생을 강요했다. 오늘날 3농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많은 혁명에서 보듯이 중국에서도 혁명의 자기 배반을 반복했다.

흥미로운 건 여기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의 시대가 가니 다시 량수밍의 사상이 소환됐다. 후진타오 시기부터 중국은 3농을 가장 중요한 정책 아젠더로 설정했고 다시 신향촌건설을 시작했으며 전국적으로 농민전업합작사가 만들어졌다. 량수밍이 실패한 향촌건설운동이 다시 부활됐다. 그 선봉에는 원톄쥔 전 중국인민대 교수가 나섰다. 지금은 그가 길러낸 수많은 향촌건설운동 제자들이 중국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시진핑 정부에 들어와서는 신향촌건설운동, 향촌진흥을 넘어 생태문명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농업과 산업 방식으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지금 중국에서 생태문명건설은 시진핑 주석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비록 그것이 정치인의 수사라고 폄하할지도 모르겠지만 생태문명건설을 중국 헌법에도 명기하고 공산당과 정부에서 최우선 정책노선으로 설정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이후 새로운 협동조합법과 사회적경제 진흥을 위한 법이 제정되면서 전역에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등이 만들어졌다. 마을주민 간 협동과 연대를 통해 자립과 자치를 도모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무너진 농민들의 자립과 자치가 다시 부활한 것이고 역사적으로 보면, 량수밍의 향촌건설이라는 100년의 숙제를 이제야 실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로 인해 양극화와 불균형이 고도로 심화된 상태에서 협동조합운동, 사회적기업 등을 통해 과연 농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농업·농촌·농민의 문제를 농민의 자립과 자치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돌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인 생존권도 보장하지 않으면서 농민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신자유주의의 구렁텅이에 빠트려놓고 그들 스스로 살아남으라고 방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결론적으로 마오쩌둥이 실행한 토지균등분배가 지금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또 토지가 생존의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기에 그의 혁명 방식을 오늘날 적용할 수는 없지만 마오쩌둥이 감행한 자산의 일정한 균등분배 방식이 오늘날 위기에 처한 농민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평등을 연구하는 토마스 피케티는 기본소득을 넘어 기본자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지금 생존 자체가 어려워 소멸의 위기에 처한 농민에게 기본생존권이 보장되는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새로운 운동과 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마오쩌둥과 량수밍, 100년 동안의 혁명과 계몽의 변주곡이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 농촌에 더 크게 울려퍼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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