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창경원④ 창경원 벚꽃놀이 가본 사람 손들어!

  • 입력 2019.12.0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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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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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구경을 제외한다면, 나이 든 사람들이 ‘창경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밤 벚꽃놀이’다. 그런데 창경원의 벚꽃놀이 행사가 이미 해방되기 20년 전부터 열려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왕년의 창경원 수의사 김정만 씨가 들려주는 벚꽃놀이 행사의 연원은 이러하다.

“창경궁의 현판을 창경원으로 바꿔 달고 나서 2년이 지난 1911년에, 일본 놈들이 자기나라의 정신을 조선에 심는다며 창경원에다 대대적으로 벚나무 식목을 했어요. 자그마치 1,800주를 심은 겁니다. 그 나무들이 10년 남짓 자라니까 화사하게 꽃이 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일제는 그 벚꽃을 이용해서 정례적인 축제를 열어볼까 기획을 하고는, 1924년 봄에 연습 삼아서 조심스럽게 밤 벚꽃놀이 행사를 열었지요. 당시 창경원의 일본 관리들은 서울 시민들이 몰려와서 난동을 부릴 줄 알았대요. 시민들 사이에 ‘사쿠라는 일본 국화’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니까요. 어, 그런데 아무 일 없이 조용하단 말예요. 그래서 다음 해인 1925년 봄부터는 본격적으로 밤 벚꽃놀이 행사를 개최한 겁니다.”

이 벚꽃놀이 행사는 해방이 되어서 일제가 물러난 뒤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물론 6.25전쟁 기간에는 중단이 되었지만, 아직 전쟁의 상흔이 도처에 널려있던 1958년 봄에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김정만 씨의 기억으로는 그 해 4월 2일에 시작된 밤 벚꽃놀이가 열이레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일제의 잔재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놀고 즐길 만한 시설과 여유가 달리 없었던 시절, 그 밤 벚꽃놀이 행사는 무수한 인파를 창경원으로 불러 모았다. 당시에는 정부로부터 별도의 예산지원 없이, 스스로 벌어서 특별회계 방식으로 동물원 등을 운영해야 했으니, 벚꽃놀이 행사는 창경원 관계자들에게도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왔느냐고?

“말로 표현 못 해요. 인산인해였으니까. 축제기간에 쓰레기가 가장 많이 나왔던 날은 4.5톤 지엠시(GMC) 트럭으로 23대분이나 됐어요. 그 당시에 나도 정문에 나가서 표를 받아봤는데, 손이 아파서 표를 찢을 수가 없어요. 어느 날 집계를 해보니 하루에 23만3,700명이 입장했더라니까요.”

일일이 표를 받아 찢을 수가 없어서, 반 드럼짜리 드럼통에다 퍼런 물감을 물에 타서 채워놓고는 거기 빠뜨려서 재사용을 못하게 처리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500만이었다는데 창경원의 봄 벚꽃축제에 구경나온 사람이 120만에서 150만에 이르렀다.

대개 4월 중순부터 보름가량 열리는 밤 벚꽃놀이 행사기간이 되면, 종로4가에서 혜화동에 이르는 밤거리가 온통 인파로 뒤덮였다. 창경원 측에서는 비좁은 매표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예 매표박스를 원남동이나 혜화동의 길거리에 세워두고 입장권을 팔기도 했다.

창경원 벚꽃놀이 행사는 70년대 말이 될 때까지 오래도록 이어졌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창경원 밤 벚꽃놀이에 나가서 하는 짝짓기 모임을 ‘야(夜)사쿠라팅’이라는 국적 없는 조어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75년도의 봄이던가, 친구가 예쁜 여성동무 두 명을 동원한다기에 나도 설레는 마음을 간신히 다독이고 창경원에 갔는데 웬걸, 섭외에 실패했다면서 못 생긴 친구 녀석 혼자 나와 있었다. 그 날 밤, 떨어진 벚꽃이파리를 괜히 비벼 밟으면서 “와, 사람 많다!”만 중얼거리다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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