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서명을 그리다

  • 입력 2019.11.24 18:53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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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농민수당 조례제정을 위한 농민들의 활동이 전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미 서명을 마치고 조례 제정 청구를 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아직 한창 서명운동을 진행 중인 지역도 있습니다. 아 물론 경기도처럼 기본소득을 청년에서 농민까지 확대하겠다는 지자체도 있으니, 그 이름이 농민수당이든 기본소득이든지 간에 전체 농민들에게 뭔가 사회적 지원을 하는 것이 바야흐로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진즉부터 그런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연초 농민단체의 총회장에 ‘농민수당 쟁취’ 현수막이 걸려서 위용을 자랑하고, 농민단체 회원들은 듣도 보도 못한 농민수당의 의미와 방법을 공부했습니다. 농민 스스로도 이런 것을 왜 받나 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으니, 준비과정을 잘 밟는 것은 그 무슨 일에서나 값진 것임을 또 확인했습니다. 준다고 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와 목적, 무엇보다 명분이 있어야 세상에서 또 하나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군민체육대회가 있던 날, 서명용지와 접이식 책상을 들고 가서 운동장 한 편에 서서 여러 여성농민들과 함께 서명을 받았습니다. 이전부터 이날을 계획하고 있었으니 각자 조금씩이라도 기여하려 노력했습니다. 경기를 응원하는 소리와 진행자의 마이크 소리, 군중들의 웅성거림에 뒤지지 않으려 생고함을 지르며 농민수당 서명을 해 달랬더니 역시나 그 실낱같은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고 눈길을 주는 것은 농민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나이 많으신.

그게 무엇인지 몰라도 누군가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보는 자세를 가진 분들, 이른바 어르신들의 호응이 제일 좋았습니다. 어쨌건 연로한 농민분들, 특히 여성농민들의 관심 속에 서명을 받기는 받는데 나는 그만 울컥울컥 해서 고개를 돌려야 했습니다.

태권도 발차기를 할 때 발끝에 힘을 싣는 연습을 해야 힘찬 발차기로 상대를 공격하거나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필기할 때도 손가락 끝에 힘을 줘야 반듯반듯하게 써지는 것이지요. 한데 평생 괭이질 호미질 낫질하느라 어깨나 팔에는 힘을 줘봤지, 필기구 잡는 손끝에 힘을 줘본 적이 없는 농민들이 어찌 글이 되겠습니까? 상당수 농민들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고결한 자신의 이름을 너무도 정성스럽게 힘주어 그리는데 나는 왜 그리 아프던지요. 이 천덕꾸러기 농업을 지켜온 것도 당신들이요, 지금도 농업을 살려낼 농민수당을 당신들이 만들어 내자하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여느 서명과 달리 주민청구의 형식이라고 반듯반듯하게 해달라는 주문을 곁들이는 그 황송함이란, 서명을 받아본 사람들만 아는 감정이겠지요.

서명을 받으면서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손끝에서 나온 권력이 제일 힘이 세더라는 말입니다. 제아무리 어깨와 허리, 허벅지와 종아리로 일궈온 세상도 손끝의 근육으로 만든 권력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법과 제도. 거기에 농민들이 힘줘 그린 서명이 또 다른 법과 제도가 되고자 합니다.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암요. 그래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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