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4회] 농민들의 수난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4회] 농민들의 수난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11.24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공출한 쌀이 군산항에 쌓여있는 모습.
공출한 쌀이 군산항에 쌓여있는 모습.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식민지 시대 내내 약 80%의 민인이 농민이었다. 지주와 자작농을 뺀, 자작겸 소작농과 순수 소작농, 머슴이라 불리던 농업노동자의 숫자가 2,000만 민인 중 8할이었던 것이다. 결국 식민지 수탈로 인한 고통의 대부분을 농민들이 겪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3.1항쟁의 주역도 농민이었고 이후 벌어진 독립투쟁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투사들 역시 농민의 딸아들이었다.

농민 중에도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소작농이었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시작으로 토지 수탈을 가속화하면서 절대 다수의 농민들이 소작인의 처지로 떨어진 탓에 1930년대에는 그 비율이 농촌 인구의 75%에 이르렀다. 그들이 부치는 소작지는 전체 농지의 60%에 이르렀고 평균 5할에서 많게는 8할이나 9할의 소작료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지주들은 엄청난 소작료를 받으며 호의호식했다. 흔히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데 천석의 소작료를 받으려면 적어도 땅이 100정보, 즉 30만평 정도가 있어야 했다. 만석꾼은 무려 300만평 이상을 가진 지주였다. 1930년 통계를 보면 천석꾼이 조선인 757명, 일본인 236명이고 만석꾼은 조선인 43명, 일본인 65명이었다. 일제와 지주는 보호자와 보호를 받는 자의 관계였고 지주들은 수시로 거액을 걷어 일제에 상납을 했다.

쌀 생산량은 조선조 말 1,000만석 정도였던 것이 1941년에는 2,500만석 정도로 늘어났으며, 일본벼가 재래품종을 75%나 대체했다. 그러나 쌀의 유출량은 생산증가량을 앞질러 1930년대에는 생산량의 50%, 공출제도를 시행한 1940년대에는 60%가 유출되었다. 쌀을 대신하여 주식이 된 잡곡은 생산이 줄어 1930년에 280만석을 만주에서 수입했다. 농민은 미작단일화로 인해 경영의 탄력성을 잃었으며 수리조합비와 고율의 소작료로 영세화, 궁핍화의 길에 내몰렸다. 몰락한 농민은 결국 도시노동자나 걸인이 되거나 일본, 만주로 떠나갔다. 1935년에서 1940년 사이에만 이농인구가 110만명에 달했다.

1940년대 농민의 수난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공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1940년 10월 일본 내에서의 미곡관리규칙을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하여 미곡에 대한 국가관리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미곡은 모두 공출제가 되었고 국민총력부락연맹을 단위로 해서 공출필행회를 조직하여 생산자 가격으로 매입했다. 그러나 식량 수급사정이 급박해진 1943년부터 모든 잡곡을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한편, 6월에 조선식량관리 특별회계법을, 8월에 조선식량관리령를 공포하여 조선식량영단을 설립, 국가적 관리통제에 의한 강제공출체제가 확립되었다. 1944년 7월에는 ‘외지에 있어서 미곡 등의 증산과 공출장려에 관한 특별조치'에 따라 ‘생산보국'의 이름으로 공출할 식량의 생산증대까지 강요했다. 강제 공출의 강화로 1940~1944년의 양곡생산은 줄어들었으나, 공출량은 증대하여 1944년에는 전체 생산량의 60%나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미곡을 비롯한 농산물 수탈정책은 농업생산력 발전을 정체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 농민들을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처참으로 몰아넣었다.

1930년대 대중적 시위나 농장사무소 습격, 일제경찰서 습격 등 농민들의 저항은 격렬한 폭동 양상으로 나타나 항일운동의 성격이 뚜렷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약 94개 군에서 합법적 농민조합 내지 비합법적 농민조합이 결성, 활동하였다. 그러나 혁명적 농민조합은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법의 실시와 1937년 중일전쟁, 1938년 국가총동원법 공포 등 전시체제 강화와 더불어 대부분 수면 아래로 잠복하고 말았다.

해방이 될 때까지 농민들의 삶은 수난 그 자체였다. 당시 농민들의 의식주를 증언한 기록은 차마 읽기가 힘들 정도다. 배고파 술지게미를 먹고 맨발로 돌아다니다 동상이 걸리고 거적을 깐 흙집에서 잠을 청했다. 기생충과 영양실조, 전염병으로 사람의 모습을 한 농민들을 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1940년 절미운동에 동원된 농민들.
1940년 절미운동에 동원된 농민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