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쌀 관세화 협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 입력 2019.11.24 18:00
  • 기자명 강광석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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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석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강광석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이번 협상은 쌀 관세율 513%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있는 권리도 지키지 못한 굴욕협상, 쌀 농업 포기 협상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먼저 쌀 관세율 513%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이다. 1986~1988년 사이 국내 쌀값과 국제 쌀값을 고려한 수입 관세 백분율 계산공식은 WTO에 규정돼 있으며, 각 나라가 국내 쌀값과 국제 쌀값을 어떤 기준으로 계산공식에 넣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각 나라의 이익을 고려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513% 관세율 설정 당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발표한 국내 쌀값과 중국산 쌀의 관세를 포함한 국제유통가격을 국내 쌀값과 국제 쌀값으로 적용했다. 우리나라는 WTO 규정상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는 관세율 양허표를 WTO에 통보했으며, 이에 이의를 제기한 나라에게 적극적으로 관세율 양허표의 정당성을 설명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513%를 지키기 위해 다른 부분은 일부 양보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며 자가당착적 모순이다. 정부는 2015년 쌀 관세화 전면개방을 선언하면서 밥쌀수입 의무가 사라졌다는 점, 국별 쿼터가 사라졌다는 점, 수입쌀에 대한 내국민대우 조항에 따른 사용처 제한이 사라졌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쌀 전면 개방의 실익이 크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번 협상에서 위 세 가지 당연한 권리를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폐기해 버렸다. 스스로 성과라고 자찬한 권리마저 팽개치고 또다시 관세율을 지켰다고 자찬하는 모습은 보기에 처량하다.

이번 협상을 통해 전체 의무수입물량의 95%를 각 나라에 쿼터 형식으로 배정했다. 중국과 미국이 국별 쿼터 물량의 76%를 배정받았다. 최근 수출물량이 증가한 베트남 쌀을 견제하고 자국산 쌀을 한국에 안정적으로 판매하려는 중국과 미국의 요구가 관철된 것이다. 의무수입물량의 30%는 밥쌀을 수입해야 한다는 의무가 사라졌으나 이번 협상에서 밥쌀 수입을 지속하겠다고 정부는 약속했으며 국별 쿼터 물량 중 밥쌀의 비율은 공개하고 있지 않다. 미국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한국에게 의무수입물량 중 30% 이상을 밥쌀로 수입하라는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번 협상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수입쌀에 대한 해외원조 및 폐기, 대북식량지원으로의 활용가능성도 스스로 닫아 버렸다. 밥쌀 수입을 하지 않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은 이번 협상으로 정식 폐기됐다. 국별 쿼터가 실시되면 글로벌 입찰 때보다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으며 국민 혈세가 낭비될 것이 자명하다. 수입쌀을 별도 처리할 권리를 포기해 버렸기 때문에 수입쌀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국내 시장에 풀려야 하며 국내 쌀값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번 협상의 심각성은 또 여기에 있다.

농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또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이번 협상의 주무부처라는 것이다. 농식품부는 WTO 개도국 지위 포기에 대해 타 부처 눈치를 보며 말 한마디도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더니 이번 협상에서는 아예 쌀 농업포기 협상문에 제 손으로 도장을 찍고 말았다. 농식품부는 협상 완료 전이라는 이유로 국회와 국민에게 협상내용을 보고하거나 협의하지 않았다. 협상내용 비밀주의는 관료의 특혜나 무슨 대단한 권한처럼 신성불가침했으며 막상 협상의 뚜껑을 열어보면 언제나 전체 국가경제를 위해 농업은 희생돼야 한다는 결과뿐이었다.

WTO 개도국 지위 포기로 변동직불제 예산에 투여될 보조금을 반으로 자르고, 나아가 변동직불제 자체를 폐기하는 직불제 개악안을 밀어 붙이고, 관세화 협상을 통해 국내 쌀 농업을 지킬 최소한의 권리도 포기하는 정부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정부가 바뀌었지만 농민의 삶은 오히려 독재 정권 때보다 후퇴했다. 정부가 바뀌었으나 여전히 미국과 재벌만 살판나는 세상이다.’

이것이 현장 농민들의 정세인식이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농식품부는 대통령이 공약한 밥쌀 수입 반대 공약을 스스로 뒤집었다. 정권 특성상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결정이었다. 문재인정부는 출범하면서 노무현정부 시절 한-미 FTA 체결에 앞장선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같은 자리에 임명했다. 농산물 수입개방은 예견된 일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도 차마 농민반대를 의식해 실행하지 못한 변동직불제 폐지를 밀어 붙이고 있다. 직불제 개악안을 예산 부수법안으로 설정해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으로 처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농민의 운명을 농민 스스로 불길 속에서 구할 수 있을까? 오는 30일 전국농민대회가 우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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