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농촌에도 있다

  • 입력 2019.11.24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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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농사와 육아, 그리고 삶. 농촌의 ‘82년생 김지영’을 만나러 경남 고성을 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가시기 전 소밥을 주고 동이 틀 무렵 밭일에 나선 우지은(37, 고성읍 죽계리)씨가 지난 19일 양파 모종을 심기 위해 검은 비닐을 깔던 중 허리를 펴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사와 육아, 그리고 삶. 농촌의 ‘82년생 김지영’을 만나러 경남 고성을 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가시기 전 소밥을 주고 동이 틀 무렵 밭일에 나선 우지은(37, 고성읍 죽계리)씨가 지난 19일 양파 모종을 심기 위해 검은 비닐을 깔던 중 허리를 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우리 사회에 무거운 고민거리를 던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갖은 차별과 강요된 역할, 보이지 않는 폭력 속에서 성장해온 여성들은 결혼·출산과 동시에 사회 진출 기회 자체를 차단당하고 엄마·아내·며느리로 규정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중세시대나 5공화국 시절이 아니라 21세기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 절반의 관점에서 나머지 절반을 차별하고 도외시하는 우리 사회가 과연 정의롭고 평등하다 할 수 있을까.

농촌에도 김지영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도시 기준으로 20~30년쯤 이전 시대를 살아가는 김지영일 것이다. 오늘날 농촌은 극도로 고령화되고 지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돼 변화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경직돼 있다. 뿌리깊게 남아있는 가부장문화와 여러 환경들은 농민들이 20~30년 앞선 연배의 도시민들과 대화할 때야 비로소 말이 통하는 수준이다.

여성농민은 농촌경제의 주역이다. 대개의 경우 농기계를 운전하는 수월한 일은 남성농민, 농기구를 들고 하는 정교한 일은 여성농민의 몫으로 규정돼 있다. 밭농사의 8할이 여성농민의 손끝에서 이뤄지며 극한의 노동에 허리가 휘고 관절이 상하는 것도 대다수가 여성농민이다. 그럼에도 농업 경영을 증명하는 모든 서류는 남성의 명의로 이뤄져 있고, 막상 자신이 농민임을 증명할 수 있는 여성농민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농사일이 전부가 아니다. 도시로 치면 맞벌이에 해당하지만 가사노동은 오롯이 여성농민의 몫이다. 빠듯한 농업소득에 읍내 ‘식당 알바’에 나서는 일은 덤이다. 어린 자녀라도 있다면 부족한 탁아시설과 대중없는 노동시간에 일과가 꼬이고, 부양하는 부모라도 있다면 ‘며느리 노릇 잘 하는지’ 온 동네의 감시가 쏠린다.

흔히 말하는 ‘유리천장’도 도시보다 훨씬 견고하다. 농협 등 각종 조직의 임원은 물론 일개 마을 개발위원 중에조차 여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주 기초적인 사회활동을 해보려 해도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고, ‘남자 어른’들이 즐비한 조직 분위기를 홀로 감당하기도 어렵다. 마을 회의에서 젊은 여성농민이 자기 의견을 냈다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농민의 절반은 여성이다. 농업·농촌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따진다면 절반을 훨씬 뛰어넘는 가치를 가진 이들이다. 하지만 여성농민들이 농촌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농촌사회가 설정하고 부여한 ‘바람직한 여성상’에 순응 혹은 타협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전반이 범하고 있는 암묵적 차별과 억압의 우를 농촌에선 좀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반드시 평등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잘못이다. 잘못은 바꿔야 한다. 우리 농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의 안락하고 평화로운 농촌 사회구조가 사실은 잘못돼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여성농민이 농촌 안에서 존엄한 존재로 남성농민들과 나란히 서는 그 날을 우리는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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