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고성군에 사는 83년생 우지은

  • 입력 2019.11.24 18:00
  • 수정 2019.11.24 19:15
  • 기자명 장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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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장희수 기자]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은 또 다른 미디어로 재생산되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 속 독박육아‧경력단절‧성차별 등을 겪는 평범한 도시 여성의 삶을 솔직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다루기 때문이다. 도시보다 가부장제가 강한 농촌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농민의 삶은 어떨까. 열악하긴 매한가지겠지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력이 부족한 농촌의 여성농민에겐 경력단절 대신 해야 할 일거리가 산더미이다. 도시의 김지영과 비슷한 듯 다른 여성농민 우지은(37)씨의 하루를 동행 취재했다.

우지은씨 하루 일과는 소밥 주기로 시작된다. 지난 19일 새벽 5시 반, 우씨가 축사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볏짚을 놓고 있다. 축사일이 끝나자 그녀는 인근의 양파밭으로 향했다. 한승호 기자

경상남도 고성군에 살고 있는 83년생 우지은씨를 부르는 호칭은 많다. 딸, 아내, 민건‧민지‧민경이의 엄마, 언니네텃밭 막내, 놀이학교 막내 선생님, 직거래장터 판매자, 여성농민 등이 있다. 이 모든 걸 해내려면 몸이 하나로는 부족할 듯 싶다. 지은씨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므로 전날 밤 지은씨의 집에 도착했다.

24시간이 모자란 하루일과 … 혼자선 역부족

새벽 5시 20분, 알람 소리에 힘겹게 일어났다. 거실에서 잠을 자던 지은씨가 보이지 않아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니, 지은씨의 하루는 이미 시작됐다. 지은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혼자 집 근처 축사 청소, 사료 급여 및 정리일을 마치고 축사의 높낮이 조절 커튼을 걷어낸다.

지은씨는 곧바로 집 근처 밭에 가서 친정엄마 조영숙(64)씨와 멀칭 작업을 한다. 영숙씨는 딸이 농민의 길을 선택한 것을 응원하지만 고운 손에 굳은살이 늘어나는 게 안타깝다. 사실 딸 지은씨가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농사를 시작하길 바랐다. 영숙씨는 “내가 농사일과 장사일로 바빠 아이들 초등학교 때 소풍이나 운동회 같은 행사에 못갔다. 지금까지도 참 미안하게 생각하며 지은이는 무리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정도만 농사지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오전 7시, 우지은씨가 친정엄마 조영숙씨와 멀칭작업을 하고 있다. 장희수 기자 

하지만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지은씨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은씨는 “농사일로 바빠 아이들과 같이 못 놀러 다녀서 미안하다. 만약 도시에 있었으면 남편이 쉴 때 같이 놀러갈 텐데 그 점이 아쉽다”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여성농민이 혼자서 육아와 농사일을 잘 병행해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졌다. 도시 사람들이 출근하고 있는 시간에 여성농민은 축사일‧농사일‧육아를 마쳐야 한다.

지은씨는 “남편이 새벽에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지만 나도 농사일과 다른 업무를 하니 마찬가지로 힘들고 피곤하다. 같이 일을 하고 왔으면 아침이나 저녁 둘 중 한 번은 남편이 봐야 한다”며 “솔직히 지금은 독박육아에 가까운데 남편이 ‘육아는 공동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서운함을 내비쳤다.

“여자라서 배우지 못한 건 한으로 남아”

잠시 쉴 법도 하지만 지은씨는 간단하게 밥을 먹은 뒤 다시 이동한다. 매주 화요일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운영하는 언니네텃밭 고성공동체에서 사무업무를 본다. 바쁜 와중에도 텃밭 업무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농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인맥을 쌓기 위해, 부족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벌고자, 농촌 고령화로 젊은 일손이 부족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일하느라 바쁜 지은씨를 뒤로하고 꾸러미 생산자 할머니들과 이야기하게 됐다. 농촌 여성의 삶을 취재하러 온 만큼 할머니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계속 미소를 머금고 계신 할머니의 성함을 여쭤봤다. 김두필(69). 이름을 듣자마자 할머니가 태어났을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할머니는 10남매 중 3째로 딸만 8명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어머니께서 아들을 낳고자 남자이름을 지어놨는데, ‘두필’이라는 남성성 강한 이름은 아들이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당시의 남아선호사상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할머니는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셨다.

오후 1시, 우지은씨가 언니네텃밭 고성공동체에서 제철꾸러미 포장 작업을 마친 뒤 농민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승호 기자

강명숙(74) 할머니께 시부모님과의 갈등을 여쭤봤다. 할머니는 아들을 늦게 낳았는데,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말끝을 흐리셨다.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 화제를 전환해 어릴 적 꿈에 대해 물었다. 강 할머니는 “꿈이 따로 있진 않고 다시 태어나면 공부를 하고 싶다. 집에 돈이 있든 없든 여자는 공부를 안 시켜주고 아들만 공부시켰다. 나는 산후우울증을 느낄 틈도 없이 일만 했다”고 말씀하셨다.

최정분(73) 할머니, 정일순(71) 할머니, 정도연(70) 할머니께서도 “당시 꿈을 가져본 적이 없고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꿈에 대한 할머니들의 말씀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당시 남자 형제와 달리 농촌 여성들은 학습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농촌에서 농사만 지었다. 여자로 태어나 다양한 꿈을 꿀 수 조차 없던 당시 상황을 생각하니 코가 시큰해졌다.

“나도 미친 척하면 상황이 호전될까 … 변하지 않을 것”

텃밭 업무가 늦어져 지은씨는 다음 일정인 로컬푸드 입점농가 교육장소로 서둘러 움직였다. 누구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또 바쁘게 일하는 지은씨가 지칠까봐 걱정됐다. 지은씨는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 두 달 전 심한 우울감을 느꼈다고 한다. 대략 2년 전 거제도 조선소에서 선박 시운전을 하던 남편 정길영(42)씨가 회사를 관두게 되면서 친정이 있는 고성에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지은씨 부부는 농사로 먹고 살아보려 1년 반 동안 옥수수‧귀리‧벼 재배 등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농업소득으로 다섯 가족이 먹고 살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남편 길영씨는 다시 고성에 있는 조선소에 일자리를 구했다. 길영씨는 “대농도 소농도 아닌 어중간한 중소농으로 1년 농사지어 벌어들인 순수익이 회사 3개월 월급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길영씨는 선박 시운전을 하러 나가면 2달 정도 집을 비운다.

지은씨는 “남편은 없고, 벌여놓은 일은 많고, 수확은 해야 하고, 소도 키우고, 육아도 해야 했다. 특히 일을 가야 하는데 아직 어린 아이들은 나에게서 떨어지려하지 않아 울리면서까지 일을 했다”고 말했다. 더욱이 지은씨에겐 어린 시절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보며 갖게 된 남모를 상처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 부모님 가게 일까지 돕다보니까 다혈질의 아버지와 부딪히며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다. 쏟아지는 일과에 지은씨는 “‘82년생 김지영’이 시댁에서 빙의된 것처럼 나도 미친 척하면 이 문제들이 해결되고 사람들이 변할까 생각도 했다. 엄마‧아내‧딸로서 역할과 남편의 부재로 가장의 역할까지 하려니까 밤에 잠도 안 오고 모든 문제가 다 내 탓만 같았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어 “병원에 상담 받으러 가고 싶어도 비용과 거리상 쉽지 않아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Wee센터에서 상담을 받았다. 남편이 돌아왔어도 여전히 일은 많고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 소원이 있다면 혼자 아무 생각 없이 좋은 경치를 보며 계속 걷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고 말했다. 지은씨는 웃음이 많아 몰랐지만 여전히 센터에서 상담을 받을 때면 눈물이 흐른다고 한다.

마을 공동체 활동으로 되찾은 활기

지은씨의 우울감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많은 부분 해소가 됐다. 자유생활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일만 하니까 어두운 부분이 있었는데 ‘놀이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밝아졌다. 놀이학교는 ‘고성군 학부모 네트워크’에서 만난 지인들끼리 아이들에게 실뜨기, 고무줄놀이와 같은 전통놀이를 알려주는 활동이다. 지은씨는 “일은 더 바빠졌지만 취미생활에 제한이 있는 농촌에서 놀이 선생님으로서 자아성취를 할 수 있다. 사회에서 내 역할이 있다는 게 좋다”며 “고성 친구들은 모두 타지로 나가 만날 사람이 없어 외로웠다. 하지만 놀이학교를 하며 알게 된 언니들은 바로 옆에 사니까 자주 만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오전 8시 반, 스쿨버스가 집 앞 도로에 도착했다. 올해 다섯 살, 막내인 민경이가 엄마에게 업어달라고 칭얼거리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은씨의 꿈은 마을에 공동육아 놀이터를 만드는 것이다. 도시와 달리 농촌에는 키즈카페가 없다. 키즈카페는 아이들이 노는 공간도 되지만, 부모들에겐 소통의 공간이고 쉴 공간이기도 하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 농사만 짓는 여성농민들은 만나는 사람이 적으니 정보도 제한적이다. 마을에 공동육아 놀이터를 만들면 아이들 사이에서도 보육이 이뤄지고 엄마들은 정보를 교환하거나 그 틈에 잠시나마 육아나 농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꿈 이야기를 하는 지은씨의 손은 여전히 직거래매장에서 팔 귀리를 포장하고 있고 그 옆엔 아이들이 인터뷰 중인 엄마를 애타게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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