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정가·수의매매, 농민 가슴에 대못

농민 위한 정가·수의매매 변질
수입무·양배추 기록상장 시도
폭락·재해 농민사정 ‘나몰라라’

  • 입력 2019.11.17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가락시장 중국산 무·양배추 기록상장 사건의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정가·수의매매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생산자와 함께해야 할 공영도매시장이 산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민들이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정가·수의매매는 도매법인이 출하자·중도매인 각각과 접촉해 둘을 연결시켜 주는 거래방식이다. 경매의 보완장치로서 출하자의 출하선택권과 가격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2012년 도입된 바 있다. 그런데 이 정가·수의매매가 도매시장에서 거의 거래되지 않는 수입산 무·양배추 유통에 악용되고 있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가락시장에서 영업을 하는 A중도매인은 지난 4일 도매법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수입유통업자로부터 중국산 무 200박스를 반입했다. 도매법인과 함께 정가·수의매매로 서류를 위조(기록상장)해 불법유통을 하려던 차였지만, 시장을 감시하던 출하자단체에 적발돼 실패했다. 이 중도매인은 이후 지난 7일과 12일에도 기록상장을 노리고 중국산 양배추를 각각 5톤트럭 두 대 분량씩 반입했다가 역시 출하자단체의 반발에 물러섰다.

정가·수의매매의 편법운영 행태가 농민과 도매시장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일 가락시장에 반입된 중국산 양배추. 한국농업유통법인중앙연합회 제공
정가·수의매매의 편법운영 행태가 농민과 도매시장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일 가락시장에 반입된 중국산 양배추. 한국농업유통법인중앙연합회 제공

정가·수의매매의 기록상장 행태는 암암리에 만연해 있지만 이번 사건은 그것이 명백하게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더욱이 대상이 중국산 무·양배추였던 만큼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국산 무·양배추는 지난해 겨울부터 근 1년간 극심한 폭락을 겪어왔으며 최근 가격이 회복됐다지만 반복된 재해로 작황이 무너져 농가소득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생산자·소비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공영도매시장에서 각종 특혜를 받고 영업하는 중도매인이 산지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상장은 법적 책임의 영역이지만 수입 유통 자체에도 도의적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도매법인의 책임도 크다. 가락시장에선 대아청과·한국청과 등 일부 도매법인을 제외하곤 무·양배추 경매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도매법인-중도매인 소속관계가 여전히 허물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도매인의 상품 구색을 위해선 정가·수의매매의 활용이 중요하다. 농민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는 도매법인들은 책임감을 갖고 국내 출하자와 중도매인을 연결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도매법인들은 주로 경매에 집중하고 정가·수의매매에 대한 의지나 능력이 결여돼 있다. 중도매인들이 수입 농산물을 가져와 기록상장을 한다 해도, 눈감고 협조만 해 주면 가만히 앉아 수수료를 챙길 수 있고 자신들의 정가·수의매매 실적도 올릴 수 있다. 정가·수의매매 실적은 농식품부가 시행하는 전국 도매법인 평가의 중요한 평가기준이다. 비록 이번 거래는 불발됐지만 “계속 이런식으로(기록상장) 거래해 왔다”는 A중도매인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도매법인이 공조해온 정황이 명백하다.

또한 이번 기록상장 거래가 불발된 것은 가락시장 관리자인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공사)가 도매법인에 거래 자제 권고를 하고 도매법인이 A중도매인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공사가 단속을 통한 일벌백계보다 사건 자체의 무마를 택한 정황이 엿보인다. 기록상장 시도 정황이 명백함에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A중도매인을 처벌할 근거는 없어졌다.

농민들을 위해 도입된 정가·수의매매는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변질됐다. 중도매인은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에 상관없이 수입농산물을 들여오고 도매법인은 이를 통해 수수료와 실적을 챙기며, 중도매인-도매법인-공사가 이같은 현실을 암묵적으로 묵인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도매시장의 제도와 실제 유통현실이 농민들의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