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농업인의 날 단상 - 올바른 정책은 예산을 통해 반영된다

  • 입력 2019.11.17 18:00
  • 수정 2019.11.21 09:09
  • 기자명 권혁주(충남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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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주(충남 부여)
권혁주(충남 부여)

이른 아침마다 나타나는 자욱한 안개 때문인지 운전을 해서 딸기하우스에 가는 것 자체가 고역인 나날이다. 어느덧 가을인 듯 싶더니 벌써 겨울문턱이다. 새벽녘 집을 나설 때마다 짙은 안개와 서리, 살얼음의 풍경이 돌림노래처럼 반복된다. 그런 날씨를 뒤로한 채 농민들은 수차례 태풍으로 쓰러진 벼를 겨우 일으키며 수확을 마쳤고 지금껏 미뤄뒀던 콩, 들깨 등의 갈무리와 김장 준비로 나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요즘 허리와 무릎이 말썽인 탓에 지난 부여군 농업인의 날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행사에 다녀온 아내의 말과 각종 기사를 보니 행사장 풍경이 어렴풋이나마 그려진다. 여느 때처럼 기념식 자리엔 군수, 국회의원, 군의회 의장 등의 축사가 쏟아지고 농민단체별로 몇 명의 수상자를 정해 표창패를 주고받는 그저 그런 행사였나보다.

여당 편에 선 사람들은 농업의 희망을 이야기하며 공치사를 늘어놓기 바빴을 것이며, 야당 편에 선 사람들은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논조로 자신의 정치적 셈법을 유감없이 말로 쏟아냈으리라. 우리 지역은 지난 지방선거 이후 여야가 처음으로 바뀌었을 뿐 발언의 형식과 내용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전언이다.

기념식이 끝나면 읍면별로 준비해온 점심식사와 함께 술잔이 돌면서 농민들에게 인사하러 오는 정치인, 행정관계자들과 반갑고도 어색한 악수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식사 후에는 초고령화 시대에 걸맞게 농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과 노래자랑으로 모든 행사를 마무리 했을 것이다. 전국의 모든 행사장이 우리 지역처럼 농업인의 날을 자축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공식행사 때는 거의 언급이 없었던 농업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며 살아갈 방안을 찾으려는 농민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변동직불금도 안 주면서 공익형 직불제는 어찌 한다는 건지, 농민수당은 언제 지급되는지, 농업회의소나 푸드플랜 등 거창한 민관협치 모델을 지역에서부터 만들자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해결할 것인지, 11월에는 농민집회가 많으니 주최단체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지역에서 함께 참여하자는 제안까지 농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높아졌다고 한다. 극한으로 치달은 농업위기에 따른 농민들의 자연스런 반응일 수도 있겠다. 행사장에서는 꿈과 희망이 주제이고, 현장에서는 위기와 불안함을 이야기하니 엇박자가 따로 없을 따름이다.

최근 우리 지역에는 일반산업단지 유치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동네방네 걸려있다. 742억원이나 되는 큰 예산을 따냈다고 이를 홍보하는 현수막이다. 현수막 명의는 여야가 따로 없고 민관이 따로 없었다. 농업농촌과 문화관광을 기반으로 한 지역에서 개발예산을 끌어온 걸 비토할 생각은 없으나 마치 ‘개발만이 살길이다’라는 식의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산업단지를 유치하면 지역경제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지역민 위주의 일자리 창출은 가능하기는 한 건지,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오직 개발논리라는 절대적 가치가 온 사회를 휩쓸면서 다른 이야기는 들으려하지 않는 듯하다. OECD에 가입하면 선진국이 되는 것 마냥 온갖 홍보를 해대던 대학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요즘 한국농민은 선진국 농민이라 개도국 지위를 포기해도 농업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공언하면서 대책 아닌 대책을 남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촛불혁명으로 당선된 대통령은 후보시절 “농민은 우리의 식량안보를 지키는 공직자”라고 했다. 지지 여부를 떠나 꽤나 매력적인 언급이라 오래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또한 대통령은 최근 “재정은 국가정책을 실현하는 수단입니다. 특히 예산안과 세법개정안에는 우리 사회가 가야할 방향과 목표가 담겨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올해 농사가 다 끝나가는데 아직 작년 변동직불금도 못 받고 있고 농업예산은 제자리걸음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 수치처럼 농업예산도 그 수준을 유지하거나 축소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예산은 있는데 정책이 없는지, 정책은 훌륭한데 예산이 없는지 도통 모르겠다.

말끝마다 ‘공정’과 ‘포용’을 외치는 그들은 왜 농업·농민·농촌에게만 이렇게 가혹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019년 농업인의 날에도 대통령의 립서비스조차 없었다. 가을인 듯 가을 아닌 겨울 같은 몹시 추운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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