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3회] 끔찍하다, 민생단 사건

  • 입력 2019.11.17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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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민생단 사건 당시 조선 유격대원들의 모습.
민생단 사건 당시 조선 유격대원들의 모습.

 

1920년대에 독립운동사 최대의 비극인 자유시참변이 일어났고 불과 10여년이 지나 다시 끔찍한 참극이 일어난다. 1933년 초부터 약 3년여에 걸쳐 항일투쟁에 나선 조선인 500여명이 학살당하고 수천 명이 체포, 고문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민생단 사건이라고 부른다. 애초에 민생단이라는 단체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만주에 사는 동포들을 중심으로 일제에 협력하며 조선인의 자치를 실현해보겠다는 공개적인 친일단체였는데, 불과 5개월 정도 지속되다가 해체된 아무 의미도 없는 조직이었다. 민생단 조직을 주도한 자는 친일파 최남선의 매제이자 나중에 폴란드 주재 만주국 총영사가 되는 박석윤이라는 자였다.

시작은 사소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원 한 명이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했는데 탈출 과정을 의심하여 중국공산당이 가혹한 심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는 중국공산당 안에 조선인 민생단원 20여명이 암약하고 있다는 자백을 한다. 고문을 못 이긴 허위자백인지 사실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스무 명은 즉각 총살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소위 ‘반민생단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동지가 동지를 믿지 못하는 공포스러운 상황은 조선인 유격대원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일제에게 당한 모든 것에 대한 복수가 가까이 있는 내부의 적들로 향하게 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일부 중국공산당원들은 조선인 전체가 민생단이라고 의심하는 지경이 되었다.

일단 민생단으로 의심받으면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그 누구도 의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밥을 먹다 흘리면 어렵게 구한 식량을 낭비하니까 일제의 첩자라고 몰렸고 심지어 밥을 물에 말아먹어도 화장실을 자주 가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행위라고 의심받았다. 일이 어렵다는 불평을 하면 민생단이요,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정체를 숨기려는 민생단이 되었다. 의심은 불안이 되고 어느 영화 제목처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기 마련이다. 불안은 동지를 의심하게 하고 서로에 대한 의심은 다시 불안을 증폭시킨다. 적들과 칼끝처럼 맞선 유격전 상황에서 동지에 대한 의심은 치명적이었다. 나중에는 상대를 의심하지 않는 것조차 문제가 되기에 이르렀다. 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일제 스파이로 몰려 동지의 손에 처형당한 것도 민생단 사건의 여파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광기어린 3년여 동안 항일투쟁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어느 학자는 중국공산당이 조선족 간부들을 숙청, 총살하고 만주지역에서의 유격대 주도권을 잡으려는 범죄적 종파투쟁으로 규정하는데, 그렇다면 소위 국제주의를 원칙으로 삼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그들의 모토 아니었던가. 어쨌든 민생단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환영이었고 일제에 대한 병적인 피해망상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조선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혁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료를 거짓으로 밀고하고 직접 죽이는 데 나서기도 했다. 나라를 잃고 독립투쟁마저 남의 나라에서 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은 이토록 비극적인 상황에서 투쟁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민생단 사건은 훗날 모택동 홍위병과 4인방이 주도했던 문화혁명의 전초전 같은 성격을 지닌 사건이기도 했다.

민생단 사태는 동만특별위원회 책임자인 위증민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제5차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1936년 3월 상순에 주재한 동만특별위원회와 제2군의 영도간부회의를 계기로 겨우 중지되었다. 국제공산당과 중국공산당 대표단은 조선이 독립하는 데 대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고,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군대를 조직할 수도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서 민족주의적인 투쟁과 조선 독립을 말해도 간첩으로 몰릴 위험이 사라졌다.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가 결성되고, 조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가능할 수 있었던 전환점이 비로소 마련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은 사건이었다.

일제 밀정 혐의로 처형당한 김산.
일제 밀정 혐의로 처형당한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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