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적인 삶, 텃밭

  • 입력 2019.11.10 18:00
  • 기자명 오미란 (전)젠더 & 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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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언니네텃밭, 왜 언니일까? 누나가 아니고. 예로부터 의좋은 형제 얘기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의좋은 자매 얘기는 찾기가 어렵다. 심지어 심리학에서는 여성들끼리 갖는 일반적인 감정을 질투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니라는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언니는 여성들끼리 나누는 연대애이고 자매애이다. 언니는 언니들이 짓는 농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언니들끼리 주고받는 살림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주체들끼리의 관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의미로 텃밭은 말 그대로 살림(먹거리)의 밑천이다. 텃밭이 있어 밥상이 있고, 밥상이 있어 일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텃밭은 터를 지키는 밭이고 살림을 가능케 하는 밭이다. 언니네텃밭. 살림의 의미를 나누는 관계의 정의가 여기에 들어있다. 그래서 언니네텃밭은 그 자체로 협동적인 삶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햇수로 10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언니네텃밭의 역사이다. 올해 10주년 행사에서 언니네텃밭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여성농민의 품안에 있어온 ‘텃밭’을 의지 삼아 시작했다고 말한다. 텃밭을 의지 삼아 얼굴있는 생산자와 마음을 알아주는 소비자가 함께하는 기치를 세우고 시작한 언니네텃밭은 기본적으로 협동적인 삶을 나누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사업이다.

정부의 사회적 경제 지원 정책에 선정돼 예비사회적기업으로 3년을 인큐베이팅하고 성장하면서 터를 닦았고 지금은 강산이 변해서 협동조합으로 성장한 언니네텃밭. 여전히 갈 길은 멀고 어렵지만 미래를 향한 힘찬 날개짓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언니네텃밭의 생산자는 250여명, 전국 최초로 시작된 ‘제철 꾸러미’로 시작해서 지금은 특판 직거래를 통해 ‘언니네 장터’를 성장시키고 있는 언니네텃밭은 소농들이 이끌어가는 협동적인 삶의 이정표를 만들고 있다. 언니네텃밭을 단순히 도-농 직거래로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수많은 농민들이 더 잘하고 더 많이 하고 있다. 단순히 농산물 판매라는 의미뿐이라면 언니네텃밭이 아닌 농산물 전자상거래나 SNS를 통한 유통 채널로 가면 된다. 그러나 여성농민회의 언니네텃밭은 단순한 농산물 거래가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동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성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단순한 직거래가 아니라 생산자로서 자신 스스로의 삶의 변화(종자보존, 1차 가공, 소포장 유통, 장터판매나 행사판매 등)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통해 주체로 성장해가는 경험을 한다. 소비자 역시 함께 음식을 만들고 가치를 학습하면서 협동하는 삶을 통한 나눔의 농사를 짓는다.

쉐프는 토종요리를 하고, 도시의 어느 마을센터에서는 토종음식을 배운다. 소비자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언니들이 된다. 협동하는 언니들. 협동의 텃밭에서 함께 성장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언니네텃밭이 된다. 10년 동안 여성농민들은 투쟁하는 여성농민에서 두 손에 떡을 들고 생명과 삶을 노래하는 여성농민으로 성장해왔다.

지난 3월 서울시 관악구 관악문화관에서 열린 ‘언니네텃밭 10년 맞이 한마당’에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여성농민 생산자들과 도시 소비자들이 기념식을 마친 뒤 단상에 올라 “언니네텃밭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3월 서울시 관악구 관악문화관에서 열린 ‘언니네텃밭 10년 맞이 한마당’에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여성농민 생산자들과 도시 소비자들이 기념식을 마친 뒤 단상에 올라 “언니네텃밭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산은 높고, 물은 깊고, 갈 길은 멀다

언니네텃밭의 성과에 대해 언니네텃밭 10주년 기념 토론문에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국내최초 전국단위 꾸러미 직거래 방식 사업화, 성공적인 소농(여성농민)의 지속가능한 농업 실천의 대표주자, 도농연대와 상생의 실천의 모범, 식량주권 실현 운동의 선봉대, 여성농민의 노동의 가치 실현, 사회적 기여에 앞장서다(기부꾸러미 등). 건강한 먹거리 인식 제고 및 식생활 개선에 기여, 먹거리를 통한 사회적 연대 활성화, 지역의 로컬푸드 기반 구축에 기여, 진보적인 사회적 가치(성평등 / 생태 / 친환경 / 여성주의 등) 실현의 모범….'

이 말대로라면 텃밭이 답이다. 그러나 텃밭이 답이라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이라고 얘기하기엔 10년 동안 만든 생산자 공동체도, 소비자 공동체도 규모가 너무 적다. 더욱이 텃밭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전략적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지점에 이르면 더 많은 고민이 든다. 텃밭은 전여농이 식량주권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따라서 텃밭이 답이 되기 위해서는 식량주권의 실현이라는 대안적 농업과 대안적 삶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과 역량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10년은 워밍업이고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일지도 모른다. 로컬푸드니 생태농업이니 종자주권 등 지역먹거리 시스템(푸드플랜)이 재구축되고 있는 지금,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협동적 삶의 의미와 형태, 방식에 대해서 재검토하고 지역농업과 연계하는 체계로 정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도시 소비자를 소비지 배후로 해서는 대안적 협동적 삶에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지역순환 경제 체계 하에서 협동적 삶의 자생적 운영이 가능해지는 시스템이 중요하다.

단순한 구매자로서 소비자는 언제든 더 좋은 상품이나 관계가 나타나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가치가 공유되지 않고 가격만 공유되는 생산-소비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경쟁에 내몰려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꾸러미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협동적 삶은 빛을 발할 수 없다. 돈이 되지 않는다면 생존에서 자립이 불가능하다면 생산자의 지속적인 협업도 어려워진다. 위기는 도처에 널려있다. 어떤 지역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기도 한다. 꾸러미는 열심히 하는데 진정 식량주권운동이나 투쟁은 공유되지 못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갈 길이 멀다.

언니네텃밭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동적인 삶의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 언니네텃밭에서는 생산자들끼리 협동적 삶을 공유해야 한다. 텃밭이 단순히 먹거리를 만드는 물리적 텃밭이 아니라 삶을 가꾸고 대안적 가치와 상상을 확장하여 식량주권, 대안적인 농업, 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꿈꾸는 연대의 장소, 성장의 장소, 관계가 변화하는 행복한 삶의 장소여야 한다. 꾸러미 회원들이 생산지를 방문하고 회원 만남의 날이 있고, 음식의 의미와 가치를 요리하는 시간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경쟁하는 도시의 삶이 협동하는 농촌의 가치로 교체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은 언니네텃밭 평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애초에 언니네텃밭이 만들어가고자 했던 소비자는, 그리고 그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니였음은 분명하다. 재정이 어렵고 일할 사람의 부족을 뛰어넘어 이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소비자들과의 관계, 즉 함께하는 식량주권운동전선이 만들어지고 소비자들을 이끌고 있었을텐데…. 소비자사업에서의 첫 번째 원칙과 지향점을 단절없이 지속적으로 벌여내지는 못함으로서 식량주권 운동에서 언니네텃밭이 선도적이고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했던 바는 제대로 되지 못했다. 상기해 보건데, 식량주권 실현에 나선 두 주자(생산자와 소비자)의 손잡음이 목표였고 그 맞잡은 손들이 많아지는 것을 목표로 한 소비자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 할 때이다.”(언니네텃밭 10주년 평가전망 토론회 자료집, 2018)

미래 지속가능한 생태농업, 그리고 토종씨앗

생태농업은 전통농업의 복원, 농약 같은 화학농업으로부터 안전한 농산물의 생산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언니네텃밭이 단순한 협동의 삶이 아니라 삶의 태도, 가치, 실행이 교류되는 협동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생산물 자체가 그러한 과정과 철학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농업이나 토종씨앗을 배경과 근거로 생산에서부터 철학을 바꾸고, 재배방법을 바꾸고, 음식에 대한 철학을 바꾸는 토종요리법까지 모두 중요하다.

여성농민회가 생태농업, 무농약 등의 텃밭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보증하는 방식도 기존 친환경 인증제가 아닌 ‘자주인증제(참여인증제)’ 방식을 선택하는 등 많은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또한 토종씨앗을 둘러싼 축제, 요리, 채종포, 씨앗 나눔, 생태 학습 등 다양한 영역으로 종자주권을 홍보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것이 종합상자처럼 잘 포장됐으면 한다. 디스플레이를 잘해서 상품의 가치가 제대로 교환되고 협동적인 삶을 학습해 나가는 세트가 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여농의 언니네텃밭에 대한 활동이나 방향에 대한 정리는 언니네텃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지속가능한 농업, 농촌사회에 대한 전망을 갖고 식량주권 실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토종씨앗 지키기 사업과 언니네텃밭 사업은 자본의 영향 하에 있는 한국농업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여성농민들이 중심이 돼 대안경제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서 도농이 상생하는 협업, 협동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주체로 성장할 동력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아직 대안이라고 말하기에는 규모나 활동이 부분적이고 지엽적이지만 가치와 철학에 있어서는 분명 협동적 삶을 위한 대안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니네텃밭은 우리의 ‘꿈의 밭’이다.

꿈터이면서 삶터인 텃밭을 위해

언니네텃밭은 무엇을 심을 것인지, 몇 평의 규모에 심을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생산(농생태학)할 것인지, 생산한 농산물에 대한 가격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농사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여성농민들이 주도적으로 결정할 권리를 찾고자 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즉 언니네텃밭은 생산의 주체로서 여성농민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사업이다(전여농 언니네텃밭 강의안).

전여농이 정의하는 언니네텃밭

1) 언니네텃밭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식량주권 사업단이다.

2) 언니네텃밭은 대안경제 사업단(공동체)이다.

3) 언니네텃밭은 현장의 여성농민들이 마을단위, 면단위를 지역적 기반으로 자발적이고 자조적으로 구성한 생산자조직으로 운동과 사업을 동시에 수행한다.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가? 생산방식의 자주성, 운영방식의 소통을 통한 공동체 지원농업, 대안경제 시스템을 위한 자립적 공동체… 그런데 개념이 너무 크다. 작고 소박한 것에서 출발해서 단계적으로 목표로 가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다만 좌표를 명확히 하고 한발 한발 나아가는 협동적 삶을 만드는 텃밭이 됐으면 한다.

*오미란 (전)젠더&공동체 대표는 현재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여성정책팀 과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리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농민에 주목합니다. 새해를 맞아 ‘오미란의 한국여성농민운동사’를 월 1회 연재합니다.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가 시간을 되짚으며 풀어내는 여성농민운동의 역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셨나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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