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바람이 분다

  • 입력 2019.11.10 18:00
  • 기자명 심문희(전남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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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산등성이로부터 시작된 단풍이 서리 한번 맞지 않은 덕에 빨갛게 노랗게 마을 안까지 선명하게 물이 들어온다. 안개 자욱한 아침을 지내면 높고 파란 하늘이 열린다. 가을이 가고 있는 것이다.

막바지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 덕에 한가했던 시골길이 차들로 그득하다. 길 건너에 논밭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다. 양편의 차들을 다 보내야 하니 마음만 급해진다. 덕분에 단풍이라도 눈망울 가득 넣어볼 수 있는 잠깐의 쉼의 시간을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지겹도록 내리던 비가 한 달 여가 지나도록 내리지 않는다. 가을걷이하기엔 딱 좋은 날씨다. 하지만 목이 말라가는 김장채소밭엔 물을 주어야 한다. 내내 주었던 스프링클러로는 안 된단다. 속이 들어차는 시기에 위에서 물을 주면 속이 펴져 버린단다. 덕분에 밭고랑 사이 분수호스를 다시 깐다.

막바지 나락을 베고 온갖 밭곡식을 들이고 양파를 심고 밀과 보리를 심는다. 때를 놓치면 안 되기에. 서리가 일찍 온 해는 포기해도 됐던 일들이 잔손을 기다리고 있다. 애호박을 따다 말려야 하고 고춧잎과 풋고추도 따야 한다. 고구마순도 말려둬야 한다.

‘엄마 뭐해?’ 카톡이 울린다. ‘고구마순 딴다.’ ‘뭐하게?’ ‘니들 맛있는 거 사줄라고.’ ‘얼마나 하는데?’ ‘시급 1,000원짜리.’ ‘ㅠㅠ’ ‘그냥 노느니 하는 것이야.’

기어이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그냥 놀아!” 돈으로 환산해 보면 이런 미친 짓을 누가 하는가 싶다. ‘어차피 서리 내리면 안 해도 되는 일이었잖아. 그까짓 것 뭐’ 하는 생각이 뱅뱅 맴돌지만 실하게 큰 것들, 조금만 손을 써두면 다 먹을 수 있는 것인데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을 보니 나도 어느새 할머니 농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수입산에 밀려나 더 이상 가격에서 상대가 되지 못한 잡곡과 건나물들이 이렇게 하나하나 광(보관창고)으로 겨울을 나기 위해 쌓여간다. 먹을거리 부자가 된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 아마 이래서 피곤하고 힘든 줄도 모르고 하는 걸꺼야!

초고령화 사회가 된 농촌의 환절기가 무섭다. 여기 저기 부고 소식이 날아온다. 일주일에 벌써 여섯 번째다. 농기계 사고까지 겹치니 그 수가 더욱 많아진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다들 그렇게 살다 가는 거겠지 싶지만 죽는 순간까지 허리 한번 바로 펴보지 못한 그들의 죽음 앞에, 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삶을 누가 제대로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자식을 기르듯 먹을거리를 길러왔던, 자신의 몸 다 바쳐 살아온 그들의 삶을 감히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시끌벅적 몇 대가 함께 살았던 농촌마을이 더 이상 후계세대 없이 홀로 살아가는 초고령화 사회, 농촌의 회색빛이 고스란히 그들의 삶에 깊은 내상을 입힌 건 아닐까? 찬바람이 뼈마디를 뚫고 들어온다. 그루터기만 남은 논이 굉음을 낸다. 갈아엎어야 씨앗을 들일 수 있다. 그곳에 밀, 보리 씨앗이 뿌려질 것이다.

내일은 여성농민행복바우처 카드를 들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겠다. 머리도 볶아버릴까? 아참, 영화 한편도 봐야지. 82년생이 아닌 68년생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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