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창경원① 창경궁, 한 때는 동물원이었다

  • 입력 2019.11.10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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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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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주 오랫동안 동물원이었다.

2001년 여름의 어느 토요일 오후, 모처럼 궁궐 나들이에 나섰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자리한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가서 명정전 앞의 휑한 조정(朝廷)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측면의 숲길로 들어서니, 궁궐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며 걷기에 더할 나위 없는 산책길이 벋어있다. 주말이었음에도 창경궁 숲길은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 복작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고적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혼자 혹은 두셋씩 드문드문하게 간격을 두고는 한정 없이 느릿느릿 고궁 오후를 걸었다.

내게도 길동무가 있었다. 당시 나는 40대 후반이었는데 70을 바라보는 어떤 노인과 함께였다. 2001년을 기준으로 셈하여도 수도권에서 물경 30년을 살았었지만 ‘창경궁’ 나들이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창경궁을 따옴표로 묶은 이유는 따로 있다.

조선 성종 때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처음 창경궁이라 명명된 그 곳은 창덕궁, 경복궁과 더불어 조선의 3대궁궐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1911년에 일제에 의해 궁궐로서의 지위도 그 명칭도 잃고 말았다. 그때부터 70여 년 동안 그 곳은 궁(宮)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이르러서야 궁궐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다시 창경궁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창경궁’ 나들이가 처음이었다, 라고 한 것은 1984년 이후로는 그 곳에 걸음을 하지 않다가, 2001년에 처음 갔다는 의미다. 물론 1970년대에는 나도 숱하게 그 곳을 드나들었다. 그 시기엔 그 곳이 창경‘궁’이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창경궁이 창경궁이 아니었던 그 70여 년 동안, 옛 궁궐이었던 그 자리는 어떤 공간으로 사용돼 왔을까? 지금부터 그 내력을 더듬어볼 것이다.

창경궁 나들이에 나와 동행한 노인은 도무지 산책에 열중하지 않았다. 그는 숲길을 걷다가 우두커니 서서 몽롱한 시선을 어느 어름에다 풀어놓고는 혼자 무엇인가 한참을 중얼거리기도 했고, 또 얼마를 걷다가 멈추고는 나에게 신이 나서 한참 동안 옛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아, 그래, 저기 맞아요. 저쪽에 호랑이 우리가 있었다고요. 그때 구경와봤으면 생각 날 텐데? 어느 핸가는 호랑이 암놈 수놈 합방을 시키느라고 꼬박 밤을 새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그뿐인 줄 알아요? 내가 이래봬도 그 무서운 호랑이 개복 수술을 다 해본 사람이라고요, 허허허.”

산책 나온 다른 이들의 귀에는 우거진 녹음 속에서 우짖는 새소리와 매미소리만이 들릴 뿐이지만, 이 노인은 똑같은 고궁 숲길 풍경을 눈앞에 두고도 그들과는 다른 야생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 저 키 큰 나무 두 그루 서 있는 그 옆쪽으로 원숭이 우리가 있었어요. 시골에서 올라온 노인 양반들하고 어린애들이 참말 좋아라 했지. 참, 아까 정문 막 들어와서 왼편으로 조금 가면, 그 공터에 무슨 동물 있었는지 기억 안 나요? 날마다 아주 신나는 행사를 했었는데?”

“아, 거기에서 붉은 두루미 떼가 춤을 추던….”

“맞아요. 거기서 하루에 몇 번 시간 정해놓고 관람객들한테 홍학(紅鶴)의 군무(群舞)를 공연했다니까요. 그 훈련을 내가 시켰어요, 허허허….”

이쯤 되면 나의 고궁 산책길 동행자가 누구였는지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동물박사’로 이름을 떨쳤던, 왕년의 창경원 동물부장 김정만 씨(2010년 작고)가 그다.

이제부터 그의 생생한 인터뷰 육성을 되살려서 창경원(昌慶苑) 얘기를 풀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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