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2회] 이봉창과 윤봉길

  • 입력 2019.11.10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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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을 저격한 이봉창 의사.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을 저격한 이봉창 의사.

일왕 히로히토는 식민지배 시기 세 번에 걸쳐 암살 시도를 당한다. 첫 번째는 아나키스트 부부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그의 결혼식에 맞추어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된 것이고, 두 번째가 이듬해인 1924년 의열단원 김지섭 열사가 일왕궁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두 사건이 실상 일왕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과 달리 세 번째는 일왕이 탄 마차 근처에서 터지기는 했다. 애석하게도 히로히토는 세 차례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일왕을 직접 노린 의열투쟁은 그때마다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특히 이봉창 의사가 1932년에 거행한 세 번째 의거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봉창은 기실 의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족의식이 거의 없는 모던보이였다. 서른 살이 되도록 도박과 유흥에 젖어 살던 그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면서 식민지 현실에 눈을 뜨고 이어서 백범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첫 번째 단원으로 가입한다. 한인애국단은 만주사변으로 인해 중국 내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임시정부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31년 말경 조직한 의열투쟁 단체였다. 임정 국무회의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김구가 단장이었고 두 번째 단원이 윤봉길이었다. 그때까지 김구는 독립운동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었다. 임정 내 관료의 한 사람쯤으로 인식되던 김구가 일약 조선독립의 총아로 떠오른 것은 한인애국단과 두 의사의 의거 덕분이었다.

이봉창은 히로히토가 도쿄 경시청 앞에서 신년 열병식에 참가했을 때 일왕이 탄 마차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1932년 1월 8일이었다. 기수가 탄 말 두 필을 쓰러뜨린 것뿐이었지만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중국의 각 신문이 대서특필하여, ‘조선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적중하지 못하였다’라고 애석해했다. 이봉창은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10월에 순국했지만 이 사건은 다시 상하이로 이어진다.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중국의 신문들이 일왕을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해 애석해 하자 이에 분기탱천한 자들이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 해군이었다. 이들은 신문사를 습격, 파괴하고 상하이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 10만과 중국군 30만이 붙은 시가전에서 비행기와 우수한 무기를 갖춘 일본이 승리하게 되었고 그들은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에 맞추어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성대한 승전 기념잔치를 벌이기로 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기념식 이틀 전에 은밀하게 홍구 공원을 답사한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이봉창보다 여덟 살 아래인 스물네 살의 윤봉길이었다. 거사 직전에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사진, 태극기 앞에서 오른손에는 권총, 왼손에는 수류탄을 든 사진을 찍었다.

기념식 날 오전 11시 30분, 윤봉길이 던진 폭탄은 대성공이었다. 상해 파견사령관이자 육군대장인 요시노리와 거류민단장 사다지가 즉사하고 일본 공사 시게미쓰와 두 명의 중장이 중상을 당했다. 훗날 미국에게 항복하며 문서에 서명했던 자가 시게미쓰인데 그는 항복하는 자리에 목발을 짚고 나왔다. 13년 전에 윤봉길에게 다리가 잘린 것이었다. 윤봉길 역시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총살당했다.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 조선독립투쟁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에 별 관심이 없던 장개석은 이 일을 계기로 급격하게 호의적으로 바뀌어 김구와 비밀회담을 여는가 하면 독립군을 훈련시켜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물론 이 의거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은 김구였다. 순식간에 임정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로 부상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임정의 상징처럼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이후에도 몇 차례 요인 암살을 시도했지만 대개 실패로 돌아가고 임정은 혹독한 가시밭길로 들어선다. 1940년 중경에 자리 잡을 때까지 무려 아홉 개의 도시를 떠돌며 겨우 임정 간판만 지키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임정 지도자들이 동포를 찾아가 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신익희가 아편장사를 했다는 바로 그 시기였다.

거사 직전의 윤봉길 의사.
거사 직전의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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