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웃어넘길 수 없었던 불편한 재회

  • 입력 2019.11.10 18:00
  • 기자명 장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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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

‘2019 김제농업기계박람회’엔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농민들로 가득했다. 추수가 거의 끝났을 무렵 치러진 행사기도 했고, 때맞춰 물든 단풍도 농민들의 나들이 기분을 돋우는 데 한 몫을 한 듯 보였다.

다양한 농기자재를 둘러보는 농민들의 들뜬 표정은 관찰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흐뭇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배토기와 써레 등을 생산·판매하는 농기계 업체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해당 업체 대호(주)는 지난해 5월 노골적인 문구와 선정적인 사진으로 광고를 제작했고 농민신문 등 농업매체에 게재해 물의를 빚었다. 업체 측은 농기계 성능을 묘사한 거라 설명했지만 의도는 명확했고, 표현은 저급했다.

이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장 김옥임, 전여농)의 규탄 성명을 필두로 민중당·정의당·녹색당 등도 논평을 쏟아 내며 비판을 금치 않았다. 당시 전여농은 “해당 회사가 농기계 성능에 대한 성적인 비유와 표현으로 여성 모델을 대상화하고 있다”며 “성평등을 요구하는 사회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의 시대 흐름을 역행하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업체 측에선 홈페이지에 게재된 사진을 내리고 사과문을 공고하는 1차적 조치와 광고 중단 및 폐기, 재발 방지를 위한 직원 성평등 교육 실시, 여성농민 친화형 농기계 개발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뼈저리게 책임을 통감하고 다시금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내부적인 자성과 후속 대책을 빠르게 논의·강구하겠다’던 대호(주)는 올해 광고에도 농기계 성능을 강조하는 수단 중 하나로 지난해의 여성 모델을 재등장시켰다.

지난번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문구는 없었지만 ‘거칠고 고된 농촌 환경 여건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전국의 여성농민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던 대호(주)의 지난해 입장과 무척 상반되는 사진이 수만 명의 관람객이 오가는 박람회장에 버젓이 자리했고 여전히 해당 광고와의 재회는 불편했다.

지난해 대호(주) 광고를 주제로 기자수첩을 쓰며 이 문제를 다시 다룰 일은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해당 업체가 올해 광고에 여성 모델을 또 등장시켰듯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없이 논·밭에서 당당한 주체로 농사짓는 여성농민의 권리 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올해의 불편한 재회가 내년엔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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