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반란’ 아닌 ‘여순민중항쟁’
‘여순반란’ 아닌 ‘여순민중항쟁’
  • 강선일 기자
  • 승인 2019.11.03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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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저서 '우린 너무 몰랐다'

[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인터뷰 막바지에 1948년 제주 4.3민중항쟁(4.3항쟁)과 여수·순천 민중항쟁(여순항쟁)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올해 초 출간한 본인의 저서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를 소개했다.

도올은 “이 책을 씀으로써 이승만정권에 의해 시작된 남한의 역사가 얼마나 왜곡됐는지 이야기하고자 했다”며 “제주 4.3항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사람이 최소 3만명 이상이며, 여순항쟁에서 학살된 사람도 최소 2만명 이상이다. 이처럼 수만명이 학살당한 역사가 우리 농촌의 역사, 농민의 역사”라 강조했다. 도올은 1948년 10월 전남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 벌어진 사건을 ‘여순반란’이 아닌 ‘여순민중항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처음 주장한 바 있다.

왜 이 사건이 ‘반란’이 아닌 ‘항쟁’으로 규정돼야 하는지 보려면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볼 필요가 있다.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미국과 이승만정권의 제주도 ‘토벌’ 출동명령을 거부하면서 여수·순천 일대에서 봉기한 사건이다. 당시 이승만정권이 14연대에 내린 명령은 남북분단을 막고자 4.3항쟁에 동참한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14연대는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를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복지를 위해 총궐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14연대의 주장에 호응해 지역 주민들도 대대적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특히 농민들의 참여가 눈에 띄는데, 그 배경 중 하나로 1948년 전남지역의 열악한 식량난과 자연재해가 거론된다. 도올이 책에서 언급한 데 따르면, 1948년 전남의 보리수확량은 전년 대비 4할이 감소했다. 여기에 1948년 6~9월에 걸쳐 태풍이 3차례, 장마가 30여일간 계속됐다. 그해 8월 25일 조사된 전남지역의 총 피해액은 당시 돈으로 200억원을 넘었고, 6~8월에 걸친 재해로 인한 전남지역 사망자는 200명을 넘었다. 그럼에도 미군정, 그리고 그해 8월 15일 들어선 이승만정권은 어떤 구호의 손길도 뻗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은 농가로부터 식량을 공출하는 데 몰두했다. 미군정은 1946년부터 도시민에 대한 식량배급을 명분으로 ‘미곡수집령’을 공포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제 말기를 능가하는 수준의 강압적 식량 징발이 이뤄졌다. 1948년 전남의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전남에서 공출한 보리량은 전년 대비 3만5,000석이 늘어난 19만8,000석이었다.

미곡수집령으로 대표되는 미군정의 강압적 정책,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했던 이승만정권과 미국의 정책은 1946년 10월 항쟁과 1948년 4.3항쟁, 그리고 여순항쟁의 원인이었다. 농민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생존권을 위해, 그리고 분단을 막기 위해 항쟁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정권과 미국은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 동족 학살과 분단을 반대하고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항쟁은 ‘반란’으로 규정됐다.

도올은 책을 소개하면서 “역사의 주도세력이었음에도 희생당해온 민중의 역사를 책으로 써 사실을 밝히고자 했을 뿐인데, 이에 대해 보수세력 일각에서 나를 고소해 고생도 엄청 했다”며 “오는 19일 전남 구례에서 열리는 여순민중항쟁 희생자 위령제에서 지역민들의 부탁으로 초혼관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도올은 이어 “책에서 언급한 내용이 최근 법적으로도 공론화되고 있어 다행”이라며 “여순민중항쟁 당시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준비 중인 점도 고무적”이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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