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WTO 개도국 지위 포기는 농업 포기 선언, 즉각 철회돼야

  • 입력 2019.11.03 18:00
  • 기자명 박종서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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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서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사무총장
박종서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사무총장

 

지난달 25일 정부는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중국과의 무역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국익을 고려한다는 명분으로 농업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주류언론과 시장주의 경제론자들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 하더라도 당장은 피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국제정세 속에서 언제 다시 다자간 협의가 이뤄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며, 향후 농업 강국과의 무역협상에서 농산물 수입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질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다.

WTO 출범 당시 우리나라는 농산물 무역수지 악화, 농업기반시설 낙후 및 낮은 국제 경쟁력, 농가소득저하 및 농산물 가격의 높은 변동성 등을 이유로 농업부문의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20여년간 관세와 보조금에서 개도국 수준의 보호를 받으면서 농업 보호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식량자급률은 1995년 29.1%에서 2018년 24% 밑으로 떨어져 안정적인 식량 공급에 대한 자급 능력이 낮아졌으며, 농업소득은 1,047만원에서 1,292만원으로 20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도시 가구 대비 농가 소득은 95%에서 65%로 낮아져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감귤, 마늘, 양파, 대파 등 주요 농산물의 가격폭락과 세 차례의 태풍으로 논과 밭이 쓰러지고 쓸려 내려가 성한 곳 없이 처참한 지경이다. 생산비는 고사하고 인건비도 건지기 힘든 참담한 현실이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하면서 공익형직불제 도입, 재해보험 개편, 로컬푸드 확대, 품목별 의무자조금 도입, 청년후계농 육성 등을 대책으로 발표하였다. 농업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반쪽짜리 대책이라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농민들의 요구는 분명하다. 나도 국민이며 농업을 홀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생산한 농산물을 공정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라는 것이다. 바로 주요 농산물 공공수급제에 대한 요구이다.

주요 농산물 공공수급제란 농산물을 공공재로 보고 농산물 수급에 정부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으로 수확기 주요농산물의 적정량을 국가가 매입해 농산물 가격폭락 및 폭등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제도이다. 즉 농민에게 인건비를 포함한 생산비와 재생산을 위한 기본비용을 합한 적정가격을 보장하고, 국민에게 안정된 가격으로 농산물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농민에게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국민에게는 건강한 밥상을 책임질 수 있는 획기적 정책이라 할 수 있다.

공익형직불제 도입과 관련하여 농업의 생태·환경보전 등 공익적 기능에 대한 보상과 비효율적인 농업예산을 대폭 감축하여 농민들에게 직접 지급액을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행돼야 할 점은 변동직불제 폐지로 인한 쌀 가격안정 장치에 대한 근본대책이 제시돼야 한다는 것이다. 2005년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공공비축제가 도입된 이래 변동직불제는 쌀 가격의 안정을 도모하여 쌀만이라도 자급을 이룰 수 있게 한 중요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현재 변동직불제 폐지 대안으로 생산조정제와 초과물량 시장격리제가 정부와 국회 내에서 논의되고 있으나 이는 쌀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장 농민들과의 충분한 소통을 통해 농업 회생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 없이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 농업의 마지막 보루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농민들은 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기 전 농정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1995년 농업부문에 대해 개도국 지위를 선언했던 당시와 2019년 현재 농민들의 삶이 나아졌는가. 국민 전체 소득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농민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더욱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정부 당국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농정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 없이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농업 포기 선언과 다름없다. 따라서 즉각 철회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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