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푸근한 농촌 복원해야 한다”

이 사람ㅣ충남 홍성농민 정민철씨

  • 입력 2019.10.27 23:53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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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충남 홍성군 홍동면 ‘젊은협업농장 정민철 박사’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농업 쪽에서 나름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특이한 이력과 활동 탓이다. ‘박사’가 농사를 한다는 것도 의외인데 협업농장까지 운영하고 있다. 마을, 농촌, 공동체는 정민철 박사와 연결되는 단어들이다. 농업경제학이나 농촌사회학을 전공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정민철 박사는 미생물학 박사이다.

“경주가 고향이예요. 아버지는 학교선생님이셨죠. 학교는 대구에서 다녔구요. 공부만 했을 뿐 농사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정씨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흐트러짐 없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1980년대 대학생들이 가진 시대적 사명을 청년 정민철 역시 외면할 수 없었다. “조직사건으로 지명수배가 됐어요. 경찰에 쫓겨 다녔죠. 학교에는 경찰이 못 들어오니까 주로 학교 안에서 2~3년 지낸 거 같아요. 그러다가 졸업을 하게 됐고. 어쩔 수 없이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김영삼정권이 들어서고 사면 복권되면서 자유로워졌어요.” 지명수배가 됐던 정씨는 취업을 할 수 없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농업과의 우연한 인연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에 있을 때 우연히 유기농업 기술인 BMW(박테리아미네랄워터)기술을 일본에서 도입하는 일에 관여하게 됐어요. 정홍규 신부님께서 대구 푸른평화생협과 일본의 생협과 교류하면서 BMW에 대해 알게 되신 거예요. 일본의 농민들은 많이 사용한다고 하는데 한국에 들여왔으면 좋겠다고 저한테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정씨는 정홍규 신부의 요청으로 일본에 가서 기술을 도입해 한국에서 보급하는 일을 돕게 됐다. 그러던 중 홍성의 풀무학교에 기술을 보급하게 되면서 풀무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에 풀무학교가 고등기술학교로 고등부만 있었는데 전문대 수준의 전공부를 만들려고 하던 때였어요. 교장선생님이신 홍순명 선생님께서 도와 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풀무학교에 와서 전공부 만드는 일을 했어요. 허가, 건축, 교육과정, 전공부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준비한 거죠.”

그러나 2년제 유기농 전문과정을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내엔 경험과 사례가 전혀 없었다. “일본이나 중국도 다녀오고, 유럽도 가봤어요. 유기농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는데 우리와 맞는 곳이 없더라고요. 결국 우리끼리 만들기로 했죠.” 정씨는 교장선생님과 둘이 자비를 들여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해외 사례를 수집해 전공부 교육과정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했다.

“가르칠 사람도 없고 교재도 없었어요. 할 수 없이 농사를 배우기 시작했죠. 풀무학교에 와서 농사를 배우기 시작한 거였어요.” 아무런 기반과 경험 자료도 없는 척박한 상황에서 정씨와 풀무학교 선생님들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유기농업 지식을 쌓아가며 교육의 기반을 만들어갔다.

뭐든지 해야 하는 만능박사

이때가 1999년 무렵인데 국내에선 친환경농업이 급격히 확대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타결 이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농산물 개방이 시작됐다.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고 한 쌀마저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전국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농산물 개방의 대안으로 친환경농업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결국 친환경 쌀이 과잉생산되는 일이 벌어졌다. 2004년, 2005년 친환경 쌀 파동이 그것이다.

“이 지역은 1975년부터 유기농업을 했고 기반이 안정된 곳이었어요. 2000년대 초만 해도 유통업자들이 줄서서 농산물 달라고 했는데, 전국적으로 친환경 쌀이 많아지니까 여기도 팔지 못해 적자를 보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곳 농민단체에서 친환경 쌀도 품질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이 동네에서 공부 제일 많이 한 곳이 풀무학교니 거기 가서 물어 보자 하고 학교로 찾아오셨어요. 그 때 제가 벼농사를 가르치고 있었거든요. 농민들이 찾아와서 박사니까 미질 올리는 법 알려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정씨가 벼농사를 가르치게 된 것은 ‘잘해서’라기 보다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농민들이 찾아와 미질을 올리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밤마다 머리 싸매고 공부했죠. 외국 자료도 찾아보고….” 이것이 계기가 돼 풀무학교는 지역과 함께 일을 하게 됐다.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면서 기술교류도 하고 마을일도 함께 풀었다. 더 나아가 국제교류와 국제행사도 지역의 농민단체들과 함께 만들어갔다.

“2006년에 농민단체에서 찾아와서 일본하고 교류회를 하자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 학교에서 도와 달라, 이런 요청이 왔어요. ‘논 생물다양성’에 관한 교류회였는데, 저보고 발표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논 생물다양성이라는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생소했다. 일본에서는 2~3년 전부터 논의가 있었고 2006년 한국에 교류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의 유기농업은 제초제 대신 오리 넣고, 비료 대신 유박 넣는 수준이고 나머지는 기존의 재배와 동일한 방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농자재의 대체품을 찾는 방식이라고 할까.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근본을 바꾸라는 거였죠. 물 많이 넣어라, 밀식재배 하지 마라, 묘를 키워서 농사짓자, 같은.”

그러나 농민들은 새로운 농법에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섯 농가를 선발해서 연구모임을 만들고 논 한 다랑이씩 버리는 셈치고 시험재배를 하기로 했어요.” 이렇게 시작된 논 생물다양성을 위한 농사방식은 이제 유기농업에서는 일반화 됐다. 그리고 소비자 교육과 체험도 함께 하면서 유기농산물을 선택하는 것이 내 가족의 건강만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생태와 환경을 보전하는 바람직한 소비방식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정씨는 풀무학교에 있으면서 교사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지역농민들과 협력하는 일 그리고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역할도 전담했다. “이곳에는 견학 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특히 대체에너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풀무학교에 태양광 발전시설이 있었거든요. 견학 오는 사람들 안내하고 설명하려면 거기에 대해 공부하고 자료 만들고 그래야 했죠.” 미질 향상법, 생물다양성을 위한 유기농업, 대체에너지 등등 정 박사가 맡게 된 일은 전공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자료를 찾고, 직접 실험을 하는 등 새롭게 공부를 하면서 농민들, 소비자들 그리고 방문객들의 질문에까지 답해왔다.

“마을행사에 적극 참석하고, 어르신들 바쁜 일 도와드리고, 마을일도 농장일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죠”라며 정민철 박사는 마을과의 일체감을 강조했다.
“마을행사에 적극 참석하고, 어르신들 바쁜 일 도와드리고, 마을일도 농장일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죠”라며 정민철 박사는 마을과의 일체감을 강조했다.

교사 정민철에서 농민 정민철로

10여년 풀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정씨는 학교를 나와 농사를 짓기로 했다. “학교를 나와도 졸업생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거예요. 학교 안에서 2년간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고 고등부 외에 전공부까지 만들었는데 왜 농사를 못 짓나 고민이 많았어요.” 풀무학교가 농민을 양성하기 위한 전문 교육기관임에도 졸업 후 영농에 정착하는 학생들이 드물었다. 뭐가 문제인가를 고민하다가 졸업생 2명과 농사를 지어 보기로 했다.

“막상 농사를 지으려니까 땅이 없는 거예요. 학교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어요. 셋이 있는 돈 다 모아 보니까 1,000만원도 안됐어요. 당시 벼에 대한 가치를 가르치던 시절이었는데, 논은 더 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니면서 물어 봤죠. 1,000만원으로 무슨 농사지으면 되냐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시설하우스 농사다. 200평 비닐하우스 한 동을 임차했다. “쌈 채소를 하라고 해서 했는데 상추는 빼라는 거에요. 청경채, 치커리, 적근대, 트레비소, 잎브로콜리 등 이름도 생소한 것들을 심었어요.” 이런 품목들은 종자 값도 비싸고 소비량도 많지 않았다. 소비량 많고 돈이 되는 건 상추인데 상추는 이미 동네 어르신들이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작물을 권한 것이다. “첫해에는 3명이 하는데 일이 너무 많았어요. 잘 팔리지도 않고, 남는 쌈 채소는 근처 고깃집에 보내고 한 달에 한 번 삼겹살을 먹기로 했어요.”

첫해 농사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완전히 적자였다. “1년 지나니까 어르신들이 저러다 젊은이들 굶어 죽겠다고 상추 좀 심으라고 하셨어요. 1년 동안 기술도 익혔기 때문에 하우스를 늘리자고 마음먹었고, 하우스 3동을 임차해서 여기로 오게 됐어요.”

실습농장 그리고 마을

“첫해부터 농장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어요. 군대 가기 전에 농사일 해 보겠다는 청년, 방학 때 농사 배워보고 좋으면 사표 내겠다는 선생님, 안식년 1년 동안 와 있겠다는 사람 등 다양했어요. 농사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있었지 농사를 실제로 경험해 볼 곳이 없었던 거죠. 2주일, 한 달, 6개월씩 농사를 짓다가 가곤 했어요. 농장이 어려워서 점심 한 끼만 제공하는데도 괜찮다는 거에요.”

정씨의 농장은 농사일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실습농장이 됐다. “농장을 옮기고 나서 농사 배우러 온 사람이 10명이나 됐어요. 상추 팔아선 감당이 안 돼서 이 사람들을 잘 교육시켜 독립시키자는 생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어요.” 흔히 귀농하면 무슨 농사를 지어서 얼마나 돈을 벌 수 있을까를 생각하거나, 어떤 농사를 지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정씨의 생각은 달랐다.

“우선 마을일을 열심히 하게 했어요. 마을행사에 적극 참석하고, 어르신들 바쁜 일 있으면 도와드리고. 마을일도 농장일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죠. 처음에는 농장일 빨리 끝내고 집에 가면 좋은데 동네 어르신들 일 돕고, 온갖 것에 참여해야 하니 힘들어 했어요. 어르신들 파종할 때 모 심을 때 품삯도 안 받고 일했죠. 그러면 열정 페이냐면서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일한 대가를 돈으로 받지는 못했지만 마을일을 도우면서 자연스레 마을의 구성원이 돼 갔다. 시간이 더 지나니 마을 이장님이나 어르신들이 청년농민들의 독립과 정착에 내 일처럼 걱정하고 도움도 주게 됐다. “우리보다 농사기술을 더 잘 가르치는 데가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농촌의 마을을 가르치는 게 중요해요.” 정씨는 마을과 또는 마을 사람들과의 일체감을 중요하게 여겼다.

농촌을 살려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2박 3일간 80명이 체험학습을 오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농사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오면 농민들은 부담스러워 하죠. 일도 할 줄 모르고. 그래서 8개 농가를 불러서 교육을 했어요. 학생들 오면 허드렛일 시키지 말고 지금 가장 중요한 농사일 시켜라, 지금 꽃순 따는 시기인데 일하기 전에 2시간 교육시켜서 꽃순 따는 일을 시켜라, 그러면 교육비 드리겠다, 했죠. 그랬더니 농민들이 컬러프린트를 한 자료까지 준비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일을 시켰어요.”

농촌에 봉사활동을 오면 대개 허드렛일을 시킨다. 그러다 보니 농업은 힘들고 지저분하다는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정씨는 그 시기 중요한 농사일을 경험하게 해서 농업·농촌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학생체험을 받으면서 한 번 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 3년간 참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요. 처음 일을 도운 농가에 3년간 계속 가게 했어요. 농사일도 익숙해지고 농민들과 친숙해져서 개인적으로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젊은이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찾아갈 때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미래는 천지차이죠. 여기 왔다간 학생들이 그런 처지에 놓일 때 홍성에 그 아저씨가 떠올랐으면 좋겠어요. 그게 농촌이고 농촌은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어요. 그런 농촌을 살리는 게 중요해요.”

지금 홍동면에는 정씨 농장과 마을에 들어와서 정착한 농민들이 20여명이나 있다. 적지 않은 숫자다. 이 뿐 아니라 아직도 많은 청년들이 농민이 되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다. 이들은 농촌의 가치를 찾아내고 또한 만들어내면서 각자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비단 농사가 아니라도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해 농촌을 지탱하려고 한다.

“가격보장만 되면 농민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거라는 것은 착각이에요. 소득이 보장된다고 젊은이들이 농사짓는 것이 아니거든요. 돈 잘 벌고 여유로운 농촌은 없어요.” 농촌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내고 살려내는 것이 곧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고 정민철 박사는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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