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영도다리⑥ 순파제(順波堤)를 아십니까

  • 입력 2019.10.27 23:47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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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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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몇 차례씩 시간을 정해놓고 대형 기선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다리의 상판 일부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이런 다리를 도개식 교량이라고 한다.’

영도다리 건설을 앞두고 열린 설명회에서 설계 기술자가 그렇게 말한 이후로, 부산에서는 한 동안 ‘도개식(跳開式)’이라는 매우 낯선 한자말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압록강 철교의 경우 큰 배가 지날 때에는 다리 일부가 옆으로 젖혀지는 회전식 개폐 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공중으로 들어 올린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으므로, 배를 부리는 선주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일제 당국의 속임수로만 여겼다.

영도의 향토사학자 부성수 씨는 말한다.

“그 다리를 설계한 기술자가 ‘야마모토 우타로(山本卯太郞)’라는 사람이었는데 애당초에 설계했던 다리는 도개식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민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들고 일어나서 항의를 하니까 당시 부산부(釜山府)에서 그 기술자를 부산으로 오게 해서 아예 붙잡아놓고는 도개식으로 설계를 변경하게 한 것이지요. 그 설계사도 죽을 맛이었겠지요.”

자신이 설계한 다리를 두고 사람들이 하나같이 ‘기상천외’니 ‘황당무계’니 하며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다리의 모형을 만들어서 실제로 기중기로 들어 올리는 장면을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곡절을 거친 뒤에 드디어 영도다리 건설공사가 시작되었다. 1931년이었다.

영도다리 건설 공사는 국민 구제(救濟)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공근로사업 형식이다. 뒷날의 영선초등학교(2002년에 남항초등학교로 통합) 자리는 본래는 산이었는데 호안(護岸) 매립공사를 위해서 그 산을 통째로 깎아내리는 대형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공사 중에 사람 많이 죽었지요. 산을 파서 깎아내린 흙을 일단 큰 나무상자에 담아요. 상자 밑에는 레일이 깔려있었거든요. 경사진 레일 위로 그 상자를 밀고서 해안으로 내려오는데, 그러다가 중간에 흙 상자가 뒤집히면 사람들이 다치거나 깔려죽기도 하고….”

그런 희생을 지켜보면서도, 끼니 잇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가난한 시민들은, 그 국민 구제 사업에 하루라도 더 참여하기 위해 다투어 몰려들었다. 당시 이들이 받은 하루 품삯은 55전이었다. 그 무렵 쌀 1되 값이 15전이었음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품값이었다. 그러니까 뒷날 부산의 명물이 된 그 영도다리는 가난에 등 떼밀려 노역에 동원된, 가난한 식민지 백성들의 숱한 희생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야 옳다. 영도다리 건설 공사는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교량 건설공사가 거의 끝나고 준공 단계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문젯거리가 생겼다. 다리 아래로 지나다니던 소형 선박들이 교각에 부딪쳐서 파손되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어민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다리를 놓은 뒤로는 물살이 너무 세져서 키를 잡아도 배가 말을 안 듣고 제 맘대로 마구 떠밀려 내려가다가 교각을 들이받는다는 것이었다. 준공식도 하기 전에 부서진 어선이 벌써 여러 척이었다. 부산부협의회에서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결론은 이러했다.

-바다에서 다리 쪽으로 유입되는 물살을 일차로 순화시키는 시설을 해야 한다.

거친 파도를 순하게 달래서 다리 밑으로 흘려보낸다. - 그래서 구축된 제방이 바로 (방파제가 아닌) 순파제(順波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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