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농민은 죄인이 아니다

ASF·고병원성 AI 발생 책임 농가에게만 전가
유례를 찾기 힘든 대량 살처분·사육제한 남발

  • 입력 2019.10.27 18:00
  • 수정 2019.10.27 23:57
  • 기자명 홍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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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홍기원 기자]

정부가 가축전염병 방역의 책임을 사실상 농가에게만 전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 사실상 가축사육 자체를 위험하게 여기며 축산농민을 죄인 취급한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최근 경기 연천지역 한돈농민들은 살처분 조치에 대한 가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오명준 대한한돈협회 연천군지부 사무장은 “살처분 정책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한 시군행정단위 전체를 예방적 살처분한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라며 “이같은 조치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묻고자 가처분 소송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연천지역은 지난달 17일 백학면에 있는 양돈농장에서 ASF가 발생한 뒤 이달 9일엔 신서면에 위치한 양돈농장이 ASF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러자 정부는 연천지역 전체 돼지에 대한 살처분 및 수매 조치를 결정했다.

“돼지만 지켰는데 살처분하라니”

연천지역 한돈농민들은 14일 연천군청 앞에서 살처분 반대 집회를 열고 반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 사무장은 이날 집회에서 “구제역 이후 다시 분발했다. 15년 동안 농장에서 일하며 1주일에 한번 꼴로 가족들을 보고 살았다”면서 “ASF가 발생하고 한달 동안 아무 것도 안하고 농장의 돼지만 지켰는데 이제와 다 묻으라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탄식하기도 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3일 현재 연천지역은 38농가 2만여두에 대한 수매가 진행됐으며 6농가 7,000여두를 살처분한 상태다. ASF 방역 대책으로 지역 내 돼지를 수매 및 살처분하는 지역은 인천 강화, 경기 김포·파주·연천, 그리고 강원 접경지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살처분 두수는 20만두를 넘어 25만두에 달할 것이란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파주지역의 한 한돈농민은 “구제역 발생으로 살처분을 한 적 있는데 농장을 수리하고 재정비하느라 원상회복까지 2년 정도 걸렸다”라며 “이번엔 끝까지 살처분을 안하려 버텼지만 공무원들의 압력이 계속되고 농가들이 다들 손을 들어 할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파주시에서 발급한 살처분 명령서를 보면 가축전염병예방법 제20조제1항 및 동법 시행규칙 제23조제2항의 규정에 따라 살처분을 명한다고 근거를 밝히고 있다. 가전법 제57조를 보면 살처분 명령을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나아가 사육제한 또는 가축사육시설 폐쇄명령도 내릴 수 있다.

실제 2017년 3월 예방적 살처분 명령을 거부한 전북 익산시의 한 동물복지산란계농장은 2년 넘게 지리한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다. 익산시는 이미 고병원성 AI 위험이 사라진 현재까지도 살처분 명령을 거두지 않아 ‘무엇을 위한 방역조치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500m 이내’ 규정은 어디가고

ASF 긴급행동지침(SOP)은 발생농장과 발생농장 500m 이내 관리지역 농장은 즉시 돼지를 살처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국내에서 ASF가 발생하자 살처분 범위를 3㎞ 이내로 늘리고 이어 10㎞까지 확대했다. 그래도 확산 추세가 잡히지 않자 ASF 발생 시군의 사육돼지 전체를 살처분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반면, 잔반사료와 야생멧돼지에 대한 조치는 뒤늦은 감을 지우기 힘들다. 농식품부는 국내 ASF가 발생하고 나서야 잔반사료 급여를 원천 차단했지만 미등록된 양돈장에선 그 이후에도 잔반이 급이된 걸로 추정돼 관리에 소홀했단 지적을 받고 있다. 또, 야생멧돼지에서 ASF가 발생한 걸 확인한 뒤에야 경기 북부와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포획에 나서 뒷북대응이란 원성이 자자하다.

고병원성 AI에 대한 대책도 마찬가지로 농가의 책임만 강조하며 사육 자체를 막는데 급급한 모습이다. 평창동계올림픽 때문에 긴급조치로 시행된 겨울철 오리 사육제한(오리 휴지기)은 올해로 3년차 시행에 돌입한다.

이에 한국오리협회(회장 김만섭)는 24일 성명을 내고 “정부는 고병원성 AI를 11번 겪으면서 무엇을 했냐”며 “검사와 규제로 일관하는 농식품부 방역정책국은 각성하라”고 규탄했다. 오리협회는 성명을 통해 “고병원성 AI의 정확한 발생원인조차 모르면서 해당농가와 종사자들에게 그 책임을 떠밀고 있다”며 “정녕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발생 책임을 농가가 떠안아야만 하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오리 휴지기를 두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례가 없는 반강제적 사육제한”이라고 쏘아붙였다.

한 축산단체 관계자는 “농식품부가 주최한 회의에 참여해도 적당한 발언기회도 얻지 못한다. 제도나 규제를 강화할 때마다 의견수렴 명목으로 회의를 진행하지만 사전 회의자료 공유도 없고 발언을 막거나 심지어 모욕감을 주는 언사도 서슴지 않는 걸 수차례 겪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ASF나 고병원성 AI는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사회재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같은 가축전염병을 만나 생계인 가축사육이 중단된 축산농민은 이재민이나 다를 바 없다. 정부는 태풍이나 산사태를 겪은 이재민들에게 재앙을 피하지 못한 책임을 강요하는가? 축산농민들의 물음 앞에 농식품부는 언제 책임있는 답변을 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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