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들판, 한 대의 콤바인 … 작은 농민들의 추수

[ 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⑧

  • 입력 2019.10.27 18:00
  • 수정 2019.11.05 16:27
  • 기자명 한우준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한 필지의 작업이 끝나고 다시 다른 논에 콤바인을 내려놓기 전, 커피를 마시며 잠깐 휴식의 시간을 갖습니다. 벼 주인과 농기계 주인이 합심해 벼를 베어내며 들녘을 누비는 모습은 수확철 농촌의 흔한 풍경이 됐습니다.
한 필지의 작업이 끝나고 다시 다른 논에 콤바인을 내려놓기 전, 커피를 마시며 잠깐 휴식의 시간을 갖습니다. 벼 주인과 농기계 주인이 합심해 벼를 베어내며 들녘을 누비는 모습은 수확철 농촌의 흔한 풍경이 됐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수확의 시기가 왔습니다. 농촌의 가을이라고 하면 으레 황금빛 들판과 그곳에서 나올 쌀을 떠올리곤 하죠. 우리가 당연한 듯 매일 먹는 이 쌀은 어떤 과정을 거쳐 수확될까요. 추수의 계절을 맞은 관지미를 통해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의 모습과 그 속사정을 들여다봅니다.

우리나라에서 많건 적건 쌀을 생산하는 ‘논 있는 농가’의 수는 작년 기준으로 55만6,509호입니다. 전체 농가 수가 약 102만호이니, 농사일 하는 두 집 중 한 집은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든 이 시기마다 가을걷이를 하러 나간다는 얘기가 됩니다.

관지미에서도 농가 여덟 집 중 다섯 집이 벼를 벱니다. 여느 농촌이 그렇듯 관지미 사람들도 10월 중순부터 수확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벼는 수확시기에 따라 조생종·중생종·중만생종으로 나뉘는데, 경기 북부나 일부 산간 지역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논에는 중만생종을 심습니다. 예컨대 조생종 품종인 오대미로 유명한 철원에서는 올해 추석 무렵 이미 햅쌀을 수확했지요. 중만생종을 수확하는 10월 중순이 지나면 전국의 논이 텅 비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수확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관지미에서 가장 먼저 만난 풍경은 이미 수확을 마친 김상만·강창성 부부가 열심히 들깨 타작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들깨는 벼와 수확시기가 겹쳐서 이즈음의 농촌에서는 으레 쌀 수확을 끝낸 농가들이 도리깨질을 하는 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부부가 박자를 맞춰 주거니 받거니 도리깨질 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자 들려오는 말은,

“이런 거 처음 보지? 이게 양이 적어서 그렇지 기름을 짜면 없어서 못 팔아. 기자 양반도 도시 애기들처럼 쌀이 ‘쌀나무’에서 나는 줄 알고 있었지?”

이곳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무지한 저는 오늘도 놀림감이 됩니다.

이미 수확을 마친 김상만·강창성 부부가 열심히 들깨 타작을 하는 모습. 들깨는 벼와 수확시기가 겹쳐서 이즈음의 농촌에서는 으레 도리깨질을 하는 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이미 수확을 마친 김상만·강창성 부부가 열심히 들깨 타작을 하는 모습. 들깨는 벼와 수확시기가 겹쳐서 이즈음의 농촌에서는 으레 도리깨질을 하는 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들녘을 둘러보니 곳곳에서 콤바인 3대가 벼를 밀고 있습니다. 전차처럼 무한궤도를 단 중장비가 앞머리를 잘 정렬해 그대로 지나가기만 하면 알곡은 자동으로 저장탱크에 쌓이고, 지나간 자리엔 베어낸 벼만이 남죠. 안에서 무슨 마술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련의 과정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콤바인에 타고 있는 농민은, 오늘 벼를 벤다고 전해들은 마을 어르신이 아니었습니다.

“논 갈고(트랙터), 이앙기(모내기 작업을 하는 기계)까지는 내가 하는데, 이것까지는 못해.”

노인회장님이 그토록 일찍 수확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농사를 굉장히 오래 지은 노인회장님은 20년 전쯤 마련한 콤바인(동력을 갖춘 쌀 수확용 기계)이 아직 건재한 덕에 수확을 바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죠.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사실은, 콤바인을 타고 있는 농민이 대개 수확 중인 그 벼들의 주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총 7만7,000여대의 콤바인이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앞서 언급했듯 쌀농사를 짓는 농가의 수는 그 여덟 배나 됩니다. 즉 아주 많은 농민들이 남의 콤바인을 들여다 벼를 벤다는 말이 되겠죠.

“쌀이 비싼 게 아니야. 농약 주고 비료 주고 기계 값 주고 하면 지금 가격(80kg 당 19만원 대)은 모자라지. 마지기 당 농사가 잘 되면 네 가마가 나오는데, 잘 되든 안 되든 한 가마는 도지(논 임대료)로 줘야하고.”

이유는 아주 간단하게도 이것이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무지막지하게’ 비싼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1만평 이하의 소규모로 논농사를 짓는 영세 농가들이 쌀농사에 쓰이는 대형 농기계들을 전부 마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논농사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트랙터(전국 29만대)나 상대적으로 값이 싼 이앙기(전국 20만대)까지는 무리해서 구매하더라도 콤바인까지는 장만하지 못하는 농민이 많다고 합니다.

역시 임차로 1만평 농사를 짓는 유주영 이장님 댁 논으로 가봤습니다. 아직 젊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천군의 농기계 대여 사업을 통해 콤바인을 빌려 남편 김기형씨가 직접 수확했지만 사업소에서 콤바인을 없애는 바람에 별 수 없이 다른 이의 손을 빌리게 됐습니다.

콤바인 작업을 돕는 분들은 바로 옆동네 미잠리에서 이장을 보고 있는 김승의(48)씨와 아내 유정선(49)씨 부부입니다. 김씨 부부는 소유한 콤바인으로 매년 기계가 없는 주변 작은 쌀농가들의 수확 작업을 돕습니다.

베는 가격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큰 편차는 없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마지기(200평) 당 6만원. 벼를 베는 동안 콤바인이 먹어치울 경유와, 이것을 운전하는 소유주의 인건비, 그리고 줄어들 콤바인의 수명이 포함된 가격입니다. 300만원이 들어갈 유 이장님 댁 1만평은 이틀 남짓이면 다 벨 수 있다고 하니, 새삼 쌀농사의 기계화 수준에 놀랍니다.

김승의 이장의 콤바인이 파이프를 쭉 뻗어 농로의 트럭 위로 알곡을 쏟습니다. 알곡을 담은 트럭은 바로 방앗간으로 향하고, 콤바인은 다시 벼를 베러 갑니다.
김승의 이장의 콤바인이 파이프를 쭉 뻗어 농로의 트럭 위로 알곡을 쏟습니다. 알곡을 담은 트럭은 바로 방앗간으로 향하고, 콤바인은 다시 벼를 베러 갑니다.

 

“내 거 200마지기(4만평) 빼고, 한 열 집 베어주나. 마지기로는 700마지기(14만평). 수확철 시작하기 전에 예방정비를 해요. 그럼 정비에만 최하 500만원에서 700만원은 나가요. 하다가 콤바인이 멈추는 경우가 생기면 그 수리비가 어마어마하거든. 그래서 예방정비를 철저히 해요. 그 덕에 뭐 말뚝 같은 걸 못 보고 잘라버린다든가 하지 않는 이상에야, 고친다고 하루 이틀씩 세워놓는 일이 없어요. 영업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트랙터·이앙기·콤바인 등은 무척 비싼 반면 각각 한철에만 사용하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이 벼농사용 농기계들을 중심으로 지주-임차농의 관계와는 또 다른 생태계가 형성돼 있습니다.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농민은 자신의 농사를 편히 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농기계 수요를 끌어오는 ‘영업’을 통해 장기적인 추가 소득을 얻을 수 있고, 경제력이 부족하거나 나이가 들어 기계를 굴릴 수 없는 중소농·고령농들 역시 농사를 못 지을 걱정은 덜 수 있는 것이죠. 아니,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벼가 많이 넘어졌는데 내일부터 베 달라’고 전화가 오고, 내일까지 베어야 하는데 이 통화를 들은 김씨가 ‘내일도 베줄 껴?’하고 묻는 걸 보니 조금의 불편이나 불안감은 감수해야 할 듯합니다.

“국산보다는 아직 일제가 기술적으로 위에 있어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콤바인에 영어로 써 있는 상표는 읽어보니 일본어 같았는데, 일제 기계를 쓰는 이유를 물어보니 콤바인 운전에 바쁜 김씨 대신 아내 유씨가 답해줍니다. 상대적으로 기능이 우월하고, 특히 내구성이 월등해 이런 영업을 고려했을 때는 일제를 살 수밖에 없다고 하네요.

“우리는 ‘추청’하고 ‘보람찬’을 심었는데, 추청은 꽤 많이 쓰러졌대. 우리도 그렇고.”

“비료를 더 줄까말까 엄청 고민했는데 더 줬으면 큰일이 날 뻔했지. 그랬음 다 쓰러졌어.”

김기형씨가 농로에 앉아 넘어진 벼들을 베는 콤바인을 지켜봅니다. 다행히 한쪽으로 누워 수확에 큰 지장은 없었다고 하네요.
김기형씨가 농로에 앉아 넘어진 벼들을 베는 콤바인을 지켜봅니다. 다행히 한쪽으로 누워 수확에 큰 지장은 없었다고 하네요.

 

다른 일로 바쁜 유 이장님을 대신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콤바인을 지켜보고 있는 남편 김기형 씨는, 간간이 보이는 쓰러진 벼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수확량 욕심에 비료를 더 넣었더라면 벼가 약해져서 지난 초가을 연타로 몰아친 태풍에 좀 더 많이 넘어졌을 거란 추측이죠. 지금 남쪽에선 넘어진 벼가 너무 많아 농민들의 시름이 깊은데, 다행히 충북 지역은 수확에 큰 지장을 줄 정도의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이장님 댁은 이 지역에서 많이 심는 품종인 추청벼 말고도 ‘보람찬’을 농협과 계약맺고 심었는데, 혼자 살며 저도 애용하고 있는 그 즉석밥 제품에 쓰이는 것이라 하네요.

그저 지켜볼 뿐이라면, 벼 주인이 굳이 현장에 있을 필요는 없겠죠? 100%에 가깝게 기계화가 된 쌀 수확작업이지만,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선 그래도 최소 2명, 보통은 3명의 인력이 필요합니다. 저장탱크가 빵빵해지면 콤바인은 논 가장자리로 와서 톤백(800kg 가량이 들어가는 커다란 자루)을 싣고 있는 1톤 트럭에 알곡을 쏟아냅니다. 이를 위해 콤바인은 뿌리에 관절이 달린 긴 파이프를 갖고 있죠.

벼 주인 김씨와 김 이장님 아내 유씨, 두 사람은 콤바인이 쌀을 쏟아내는 동안 그것들이 톤백에 고루 차도록 자루를 계속 매만집니다. 옮겨 담기가 끝나면 바로 트럭을 몰고 농협의 미곡처리장이나 방앗간으로 향하죠. 김씨와 유씨가 교대로 바로바로 실어 나르니, 남은 한 명의 보조 아래 콤바인은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콤바인의 칼날이 닿지 않는, 논 귀퉁이의 벼를 유씨가 낫으로 직접 베어 콤바인의 컨베이어 벨트에 넣어주면 그렇게 한 필지의 작업이 끝납니다.

기계가 대부분의 작업을 전담하는 까닭에, 마을에선 유 이장님 댁 말고도 다섯 분의 고령농민이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벼농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논을 가진 농민들은 낮은 쌀값만으론 채우기 어려운 가계소득을 다른 농사나 농업 외 노동을 통해 메울 수 있다 하니, 이는 쌀농업의 기계화가 낳은 서글픈 현실이자 수혜일 것입니다. 고령이 돼서도 수입이 있으니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고요. 한편으로 이는 농가 간 빈부격차를 벌리는 주된 요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자금과 땅이 많은 농민은 그 효율성에 힘입어 더욱 고소득을 올릴 수 있을 테죠. 작은 농민, 큰 농민 할 것 없이 쉽게 쌀농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배워갑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