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 없으면 내년에 이 고생을 또 하겠나”

[ 르포 ] 전남 순천 태풍 피해 벼 추수·수매 현장

  • 입력 2019.10.27 18:00
  • 기자명 장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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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

지난 21일 전남 순천시 도사동 들녘에서 한 농민이 지난 태풍으로 인해 완전히 드러누운 벼를 콤바인으로 수확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21일 전남 순천시 도사동 들녘에서 한 농민이 지난 태풍으로 인해 완전히 드러누운 벼를 콤바인으로 수확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수발아 된 낟알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됐다는 걸 증명하듯 논바닥에 드러누운 벼 사이사이 초록의 싱그러움을 내뿜는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고, 콤바인을 앞장 서 나락을 일으키는 농민의 얼굴에선 수확의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소음을 내는 콤바인마저 없었다면 수확 중이라고 믿기 힘들 광경이었다.

지난 21일 방문한 전남 순천시 도사동 일원에선 태풍 피해 벼 추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농민 김정순(65)씨는 “올해 태풍이 세 번이나 들이치는 바람에 낟알이 떨어져 잘 영글지도 않았다”며 “주말에 아들 내외랑 손주들이 내려와서 일일이 거들어 세워줬는데도 콤바인이 들어서질 못해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콤바인으로 김씨의 수확을 돕던 서인원(67)씨는 “벼가 누워있어 기계 작업 하는 것도 까다롭다. 누운 방향으로 수확했다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평소보다 시간도 세 배 정도 더 걸리는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수확량은 평년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수확이 마무리에 접어들 때쯤 김씨는 “원래 톤백 다섯 개는 나와야 되는데 한 개도 채우질 못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하늘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인근에서 아들과 함께 수확하던 농민 정종대(72)씨도 “평년 대비 40%도 못 건졌는데 그마저도 정상 나락으로 보기 어렵다. 칠십 평생 이런 일은 처음이다. 생산비는 다 들어갔는데 수확량이 적어 손해가 막심하다”며 “정부에서 수매를 해 준다니 다행이지만 사실 앞으로가 걱정이다. 평생 해왔던 일이고 애착이 있으니 내년에 또 씨를 뿌리겠지만 점점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라고 담담히 속내를 내비쳤다.

이후 수확한 벼는 근처 건조저장시설(DSC)로 운반됐다. 순천농협(조합장 강성채)이 관내 DSC 여섯 곳 중 한 곳을 태풍 피해 벼 건조시설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강성채 조합장은 “조합원 평균연령이 68세로 대부분 고령인데다 집집마다 건조시설을 갖추고 있지도 않아 수확 이후가 사실 더 큰 난관이다. 정부에서 피해 벼를 수매하지만 산물벼를 건조하고 저장하는 일이 막막하겠단 생각에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됐다”며 “다만 매입한 벼의 등급을 하나하나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등급과 관계없이 농민들은 쌀값이 결정되는 대로 수확량에 따라 공동 계산한 금액을 정산받게 될 것”이라 밝혔다.

이날 건조시설로 수확한 벼를 가져온 한 농민은 톤백 가득 담긴 벼를 쏟아 붓고 매입확인서를 건네받았다. 아쉬움을 못내 감추던 농민은 곧 자리를 떠났고, 이을호 순천농협 도사지점장은 “낟알이 한창 여무는 시기에 태풍이 불어 수확량이 급감했다. 또 쭉정이가 많다보니 얽히고 뭉쳐 기계가 막히기도 하지만 함께 감내할 몫이라 생각한다”며 “피해를 보지 않은 농민들도 일부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까운 건조장 대신 먼 곳으로 쌀을 옮기는 수고로움을 겪고 있다. 힘들겠지만 전국의 피해 농민 모두 올 한해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농림축산식품부(장관 김현수, 농식품부)는 지난 9월 연속으로 몰아친 세 개의 태풍으로 약 3만197ha에 달하는 벼 도복 피해가 발생했으며, 수발아 및 흑수·백수 등 피해가 증가함에 따라 농가 부담 경감을 위해 피해 벼 전량을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농식품부는 지난 18일 피해 벼 매입을 위한 잠정등외 규격 A·B·C를 신설했으며 내달 30일까지 농가가 희망하는 물량을 전부 매입할 예정이다.

같은 날 순천농협 벼건조·저온저장시설에서 농협 직원들이 농민들이 가져온 태풍 피해 벼를 투입구에 쏟아 붓고 있다. 한승호 기자
같은 날 순천농협 벼건조·저온저장시설에서 농협 직원들이 농민들이 가져온 태풍 피해 벼를 투입구에 쏟아 붓고 있다.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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