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영도다리⑤ ‘저항’은 다리도 들어 올린다

  • 입력 2019.10.20 18:1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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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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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에 다리를 놓아서 육지와 연결하겠다는 일제 당국의 계획이 구체화하자, 배를 부려 먹고사는 선주들이 격렬하게 저항을 하고 나섰다. 선주 중에서도 원양까지 나다니며 고기잡이를 해온 대형 어선 임자들의 반대가 특히 심했다.

-우리 어선은 쓰시마까지 가서 고기잽이를 하는 큰 밴데, 다리가 생기모 영도 안쪽으로는 몬 지나 댕기고 저 배깥으로 한 바쿠를 삐잉 돌아 댕겨야 할 거 아이가. 그 기름 값을 행정관청에서 공짜로 대준다카드나?

-다리 생기모 자갈치 시장이고 항구고 뭣이고 다 망한다카이.

-작은 배는 교각 새다구로 끼어 댕길 수 있으이깨네 개안타고? 모리는 소리 말라캐라. 다리를 놔삘모 물살이 엄청시리 쎄져서, 배가 교각에 부딪쳐 박살이 날 기 뻔한기라.

영도의 거주민들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이야, 나룻배를 타지 않고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다리 가설을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부산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선주 단체에서 결사반대를 외치고 나서자, 온 시민이 쌍수 들어 환영할 줄로만 알았던 행정관청에서는 뜻하지 않던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선주들은 행동에 나섰다. 당장에 지금의 부산광역시의회 격인 부산부협의회(釜山府協議會)의 의원들을 배후에서 움직여 반대여론을 확산시켜 나갔다. 당시의 부산부의회는 심의권만 있을 뿐 의결권은 갖고 있지 않았으나,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시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일제 당국에서도 그들의 반대여론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연륙교 가설에 대한 선주들의 집단 반발은 결과적으로는 다리의 기능을 바꿔놓게 된다.

당시 영도다리의 설계 작업을 맡았던 사람은 일본인 설계 기술자였다. 지금의 부산시장 격인 부산부윤은 그를 불러들여서, 설계 작업 자체를 부산에서 진행하도록 했다. 드디어 설계도가 완성되어서 발표회가 열렸다. 설계기술자가 괘도를 넘겨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교량은 해상연륙교로 건설되는 조선 최초의 다리가 될 것입니다. 약 213미터 길이의 강철다리로 건설될 이 교량은, 노면 양쪽에 주민들이 도보로 건너다닐 수 있는 인도가 있고, 가운데로는 자동차나 우마차가 통행하게 되는데….

-거 복잡한 설명 치아뿔고, 수면에서 다리까지 높이가 얼매나 되는지부터 말해보소.

-아, 그러니까…만조가 됐을 때의 다리 높이는 7미터 50센티미터쯤 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뭐라? 높이가 8미터도 안 되모, 큰 기선들은 다리 밑으로 우에 지나댕기겄노. 영도 배깥으로 뺑뺑 돌아댕기라는 소리고 뭐고?

-설명회고 뭣이고 더 들을 필요 없으이께네 다 치아라 마!

선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참 만에 선주들은 ‘뭔 소린지 끝까지 들어보기나 하자’며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그 설계 기술자가 매우 ‘황당한’ 소리를 했다.

-선주 분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서 이 다리는 특별히 도개식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도개식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남포동쪽에서부터 30여 미터 길이에 해당하는, 수심이 깊은 쪽의 다리 상판 일부를 공중으로 들어 올릴 수 있게 돼 있다, 이런 얘깁니다.

-허헛, 참. 다리를 뚝 잘라서 하늘로 들어 올린다꼬? 도개식이 아이라 도깨비식이라 캐라.

선주들은 그 설계자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헛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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