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우루과이라운드(UR)라는 이름의 신호탄이 터진 이후, 농민들은 농산물 수입개방과 효율·규모화 농정에 맞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농민들은 지금껏 우리 농정당국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렇다 할 개혁을 강구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점점 농촌을 버리고 있는 현실 속에서 농민·농업·농촌은 정치세력의 주요 관심사에서 멀어져 갔고, 정치적 기반을 얻지 못한 채 위기감에 짓눌리던 농민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농정부터 바꿔보기로 했다. 아래로부터 시작해 위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달려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근래의 농민수당 운동이다. 기초지자체를 넘어 이제는 광역지자체 단위로 시행을 앞두고 있으니 이미 어느 정도 적잖은 성과를 냈다. 농민들은 광역 시행을 위한 도구로 주민조례 제정·개정·폐지 청구 제도(주민조례청구제도)를 이용했다.
지방자치법을 근거로 하는 주민조례청구제도는 지난 1999년 처음 도입됐다. 199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민주주의와 지방자치가 시작됐음을 생각하면 의외라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남 농민들은 도내 19세 이상 인구수의 1/100인 1만5,768명을 훨씬 뛰어넘은 약 4만3,000명의 서명을 받아내 조례안을 발의했다. 기초지자체마다 농민수당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고, 전남 이외의 지방에서도 속속 주민청구조례의 발의가 성사되는 등 이 기록적인 숫자에 담긴 민심은 제안서 안팎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농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농민수당을 쟁취할 수 없었다. 이 민의를 너무나 쉽게 거부할 수 있는 지방의회의 막강한 권한 때문이다.
사실 이 제도는 애당초 반쪽짜리 흉내에 불과했다. 일찌감치 지방자치권을 보장한 민주주의 선진국들의 제도를 참고해 들여왔지만, 청구 배경이나 주민 참여율과 관계없이 의결권은 무조건 의회로 넘기는 치명적인 허점을 갖고 있다. 이는 2000년대 초 학교급식 지원 조례 제정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당시 이미 드러난 허점이었으나 오늘날까지 20년째 방치돼 왔다.
그동안 이 제도를 이용해 제정된 조례의 수는 첫 시행 시기를 고려하면 매우 저조하다. 청구에 동의하는 서명인 수를 모으기 어렵다는 게 주된 요인으로 분석됐고, 이에 정부는 청구 절차를 간편화하고 요구 서명인 숫자도 줄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높은 문턱을 사뿐히 넘을 정도로 높았던 민의를 생각하면, 전남 농민수당 운동은 주민의 손으로 만들어진 지방의회가 이토록 쉽게 주민들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옳은 일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이제야말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그 손에 제대로 된 도구를 들려줘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