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바람이 좋다

  • 입력 2019.10.20 18:00
  • 기자명 주영태(전북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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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태(전북 고창)
주영태(전북 고창)

깝깝증 나는 때아닌 장마와 연이은 태풍에 미약한 것이 인간인지라 하루 왠 종일 떠들어대는 기상특보에 귀는 열려있으나 들리지 않는 대책이라 할 수도 없는 대책들. 에이 니미 바람을 뚫고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늘 거기에 있거나 좀 기다리다 보면 오는 단골집 단골들, 일명 전설의 술꾼들이 모이는 술시가 있다. “노나는 것은 식당밖에 없고마이” 하는 농형제들과 농사 지어먹기 참 힘들다는 표현을 그리 우스갯소리로 안주나 잘 내오라는 말을 시작하여 취기가 오를 즈음 정치이야기에 서로 핏대 올려가며 뻘개지는 낯이 퍽이나 꼴보기 싫다. “니 걱정이나 혀. 저그 우게놈들 니가 걱정안해도 잘 산게. 가실이 끝나면 어찌해야하나” 하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이고 걱정스러운 나랏일 걱정이겠지만 술안주 삼는 이야기인지라 그저 한 잔 술 부딪히고 목구멍 속으로 쏙 넘겨버리고 만다.

오늘은 바람이 참 좋다. 저 짝 옆밭 동기성님은 고추대를 뽑아 양파 심는다며 설거지를 하고 저짝 화봉이 성님은 마늘 심는다고 벌 나르듯 기계 끄시고 분주하다.

우리 아재 형님들 발등에 불 떨어지면 그 불 끄느라 이 바람좋은 날 하늘 한번 보기나 할까? 면민축제와 군민체전에서 구경삼아 나들이 한번 하고 돌아와 그 징상스런 일에 파묻혀 열심히 살다보면 된다는 골병드는 지름길만 시전해주시고 태풍 불어 탈탈 털린 농작물을 날 좋으면 하나 건사해내려 안간힘을 쏟는 아재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벼가 쓰러져 600만원을 들여 자빠진 나락을 세웠다는 병대네는 면 출입하는 사람들 입에 올라 입방아 찧어 칭찬 반 부러움 반 욕 반을 먹고 있다. 자빠진 나락에서 싹이 퍼렇게 올라오면 “허허이 못자리 잘해놨네” 이런 소리 듣는 것보다는 천 번 잘 한 일이다.

수고와 돈으로 환산하자면 본전이나 나올까? 그 수고로움에 값이 씌워지니 허무할 수밖에.

80이 넘으신 아재들의 끊임없는 일사랑은 “저 냥반 저러고 일헐라고 태어났는가 허시지 말어라우. 파스값도 안 나온게” 하고 복장 터지는 소릴 질러대면 그저 허연 이 내놓으시고 웃음으로 화답해주신다.

오늘은 바람이 좋다.

그랬거나 말거나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한없이 부드러운 시원한 바람을 내어준다. 어디에서 불어 주는지 몰라도 뜨거운 햇볕에 서있어도 바람은 그동안의 일들은 잊은 채 선선하게 불어준다.

밤새 내린 이슬이 고무신 신은 맨발에 닿을 때 이젠 솜털이 일 것처럼 차갑고 이슬방울 먹은 나락은 금물결을 보는 듯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귀영치 나무그늘에 가려진 퍼런 나락도 아침햇살이 나무사이를 뚫고 매만져주면 금세라도 금물을 입힐 듯 두근거려진다.

논둑에 예초기 칼날을 맞고도 땅바닥에 붙어난 쑥부쟁이도 논고랑에 빽빽이 자라 나락밭 가상까지 세력을 넓힌 고마리도 모두다 지구를 지키는 전령이지나 않을까. 삽 대신 카메라를 들고 논 둘러보는 게으른 한량농부에게 쫑끗하고 모델도 돼 주는 앙증맞은 풀꽃에 세상에 시름 다 잊혀진다.

오늘은 이다지도 바람이 좋다냐.

태풍에 쓸려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버린 팥과 메밀밭이 울컥 울화통을 터트리게 하지만 이리 바람 좋고 햇살 좋으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는 모습에 우리내와 같지 않나. 단골집 단골이 돼 거나하게 붉어진 얼굴로 아무말 잔치를 해대지만 우리끼리 알고 통하는 우리끼리 아는 함축적인 말들. 우리는 이리 대자연에 무기력하지만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갖가지 농작물과 풀꽃이나 같지나 않나. 바람 좋아 선선한 날 한없이 맑아지던 날 이런 넋두리만 가득한날 괜시리 고맙고 수분이 빠져 쭈글쭈글 매달려 있는 빠알간 대추가 참 가엾어 보이는 날. 그렇게 모질게 불어대던 바람에 온갖 힘 버티며 매달려 있는 모과와 은행과 감이 고맙고 또 고맙게 느껴지는 그런 한없이 바람좋은 날 끝내 농민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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