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9회] 백마 탄 여장군

  • 입력 2019.10.20 18:00
  • 수정 2019.10.23 20:1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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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만주를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1930년대에 유격대를 이끌던 몇몇 지도자들에게 민인들은 ‘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유격대의 활약상을 풍문으로 들으며 언젠가 장군이 조국으로 쳐들어와 일제를 몰아낼 것이라는 염원이 담긴 호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속한 부대의 계급과 상관없이 실제로 유격대원들도 존경하는 지도자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물론 아무렇게나 붙이는 칭호는 아니었다. 수많은 지도자 중에 그 영예로운 이름을 얻은 이는 많지 않다. 양세봉, 김무정, 최현, 김일성 등이 만주에서 장군으로 불린 이들이었는데 유일하게 여성이 한 명 있다.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리던 김명시가 그 인물이다.

김명시는 190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마산 사회주의운동의 맹주인 오빠 김형선, 적색노조운동을 펼친 남동생 김형윤과 함께 자랐다. 마산이 낳은 최고의 사회주의 운동가 집안이었던 것이다. 1924년에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오빠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와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나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퇴하였다. 1925년 7월 김형선이 가입해있던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가 마산 제1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해 10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뽑혀 소련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지만 1927년에 중퇴하고 상해로 파견되었다.

당시 상해 시내는 장개석의 반공 쿠데타로 인해 학살당한 젊은이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살풍경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인 홍남표, 조봉암과 함께 김명시는 중국공산당 상해 한인특별지부를 결성하고, 식민지 동양 각국의 운동가를 조직해 ‘동방피압박민족 반제자동맹’을 조직하였다. 1929년 겨울부터 홍남표와 함께 만주로 가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지침에 따라 조선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고 현지 한인지부를 건설하는데 진력한다. 또 ‘재만조선인 반일제국주의대동맹’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반일전선>을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1930년 5월 중국공산당 이립삼의 좌경주의 노선에 따라 대규모 폭동을 준비하여, 300여 명의 조선인 무장대가 하얼빈 시내의 기차역과 경찰서, 일본영사관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사건에 적극 참여한 김명시는 삼엄한 경계를 뚫고 간신히 상해에 도착해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과 함께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제작하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착수한다.

김형선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
김형선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

1932년 3월 귀국한 김명시는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상해에서 보내온 <꼼무니스트>와 지하신문 <태평양노조>등을 등사하여 비밀리에 배포하고 인천지역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을 교육하였다. 이때 오빠 김형선은 조선공산당 재건의 총책을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직이 발각되어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피하려 했으나 동지의 배신으로 신의주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조봉암, 홍남표 등 주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도 같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은 김명시에게 징역 6년을 언도하였다.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한 김명시는 만주로 건너가 무정 장군 직속하의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원으로 일본 점령지구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1939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조선의용군에 소속돼 최전방에서 여성부대원을 이끌고 선전활동과 병력 모집에 앞장서 이름을 떨쳤다. 이때의 활약으로 김명시는 여장군, 또는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렸다.

해방이 되어 귀국했을 때 종로 거리에서 민인들이 ‘김명시 장군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고 한다. 그의 활약상이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오빠 김형선은 1933년부터 해방 될 때까지 무려 13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 뛰어난 투사들은 해방 후에 잠시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나 남북이 분단되면서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명시는 1949년 부평경찰서 구치소에서 자신의 치마를 찢어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비밀리에 활동하던 김명시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숨졌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만주 벌판을 달리며 일제와 싸우던 여장군이 그렇게 사라져갔다는 사실은 비통하기 그지없다. 김형선 역시 전쟁 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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