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자천하지대본의 뜻을 다시 새긴다
농자천하지대본의 뜻을 다시 새긴다
  • 오순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
  • 승인 2019.10.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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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힘이라 했다. 이 말이 과연 농경중심 사회에서만 해당되는 말일까.

지금 농촌은 세 차례 태풍이 할퀴고 간 논밭을 온전하게 되돌리느라 몸과 마음이 부서지며 새어나오는 농민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하다. 제주에선 계속되는 비로 한 달이나 늦게 뿌린 무와 당근씨를 태풍이 연거푸 쓸어가 세 번씩 재파종을 했단다. 그 과정에 투입된 인건비며 종자값을 고사하더라도 농민들의 걱정은 여전히 크기만 하다. 곧 닥쳐올 겨울을 이겨내고 작물이 클지도 걱정이고, 육지와 한꺼번에 출하시기가 겹쳐 가격폭락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해남에선 두 번씩 심은 배추가 태풍에 나자빠지고, 뿌리썩음병까지 번져 수확자체가 힘들 지경이다. 농민들은 특별재난지역 선포와 내년에도 농사지을 수 있게 최소한의 재해대책을 요구하며 배추밭을 갈아엎고 있다. 한창 수확을 해야 할 논에서는 태풍에 납작 엎드린 벼들이 싹이 나서 수확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도 농촌의 재난사태에 대해 대통령·국회·언론 모두 꿀 먹은 벙어리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미국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국내 농산물시장을 다국적기업에 넘기려는건지 WTO 개도국 지위 유지보단 포기하는 쪽에 적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벼랑 끝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농업을 아예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는 근본 없는 짓을 하고 있다. UR협상·WTO 개방·FTA 협상 때도 늘 그랬다. 자동차를 팔아 경제를 살려야 하니, 농업이 희생양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경제 살리기인가. 부정부패로 비자금 만들어 사익을 채우는 재벌을 위해 농업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말인가. 기후변화가 심각해 전 세계 식량생산량이 계속 줄어 가격폭등이 예상된다는 보고가 연달아 나오는데도 우리 정부는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있다. 식량자급률이 25% 이하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농업을 살려 국민의 식량안보를 지켜낼 생각은 추호도 없단 말인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수입관세가 대폭 낮아진다. 국내 시장에 수입농산물이 물밀듯 들어와 국내 농산업이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뻔하다. 최소허용보조한도가 절반 이하로 떨어져, 국내농산물 가격지지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이 예측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WTO 협상이 재개되지 않는 한 문제될 게 없다며 농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매년 FTA 등 새로운 통상협상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머저리짓을 하겠다는데, 몽둥이라도 들어서 때려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밥값 300원 보장을 요구하며 쌀 목표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요구는 묵살한 채, 2년째 변동직불금을 지불하지 않고 떼먹고 있는 정부이다. 그런데, 이마저 성가신지 그나마 쌀 가격을 지지해준 변동직불금을 폐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 직불금 개편안을 국회에 상정시켰다. ‘쌀 가격보장 정책이 없는 한 변동직불금 폐지는 안된다’는 농민단체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예산부수법안으로 다뤄 이번 정기국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농민무시, 농업말살정책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자급을 하고 있는 쌀마저 국가가 책임지지 않고 시장에 내맡기겠다는 것이다.

쌀은 국민의 주식이므로 어느 정권도 쌀을 포기한 적이 없다. 올해 논에 벼 대신 다른 작물 재배를 권장해서 그렇게 했더니 마늘, 양파 과잉생산으로 밭작물들이 연쇄 폭락을 면치 못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궁궐에 논을 만들어 모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해 농사의 풍흉을 알아서 백성의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 매는데 해는 한낮, 땀방울이 곡식 아래로 떨어지네. 밥상에 담긴 밥을 누가 알랴. 알알이 모두 다 괴로움임을’ 당나라 시인의 글귀가 사무친다.

대통령도 대기업 총수도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먹는 것은 모든 것의 근본이다. 즉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농촌은 인류의 뿌리이다. 하지만 그 뿌리인 농촌이 점차 소멸되고 있다. 수입 개방으로 생산비도 못 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농업소득만으로 살 수 없어 모두가 농촌을 떠나다보니 농촌의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국가 위기 상황이다.

이를 타개하고자 내놓은 직불제 개편안은 개악에 가깝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이다. 직불제를 조금 인상시켜놓고 가격지지정책을 포기하는 꼼수는 지탄받아야 한다. 국가예산 중 농업예산을 최소 5%로 늘리고, 농업예산의 30% 정도는 직불제로 지급해야 한다. 정부는 최저생계비 턱 밑에도 못 미치는 직불금으로 중소농을 살리는 정책을 폈다고 자화자찬하며 농민단체를 이간질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제대로 된 가격보장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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