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아들 부부, 관지미를 부탁해!

[ 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⑦

  • 입력 2019.10.13 18:00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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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쇠락해가던 마을은 2년 전쯤 뜻밖의 수혈을 받았습니다. 오래 전 떠났던 관지미의 아들들이 은퇴를 앞두고 고향에서 다시 살아보겠다며 집을 지은 것이죠. 이장님은 ‘눈에 띌 정도로 활기가 생겼다’고 할 정도니,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을로 돌아온 김영창(63)씨와 부녀회장을 맡은 아내 엄춘옥(59)씨의 시점에서 관지미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2017년 12월 귀촌한 김영창·엄춘옥 부부의 집은 마을회관 바로 위에 붙어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 커다란 주방을 마련한 부부는 종종 마을 어르신들을 대접하곤 합니다.
2017년 12월 귀촌한 김영창·엄춘옥 부부의 집은 마을회관 바로 위에 붙어 있습니다. 이장님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은 김씨 부부를 비롯해 두 가구가 귀촌한 이후 마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입을 모읍니다.

 

관지미 방문을 시작한 이후 제가 줄곧 봐 왔던 마을의 화목한 분위기는 사실 비교적 최근에 새로 생성된 기류(?)라고들 합니다. 그전엔 마을에 화목함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2010년대 들어 오랫동안 마을에 계시던 어른들이 한 분씩 돌아가시면서 가구 수가 한 자릿수까지 떨어진 관지미는 분명 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죠.

관지미가 고향인 김영창씨는 도시에서 지내다 2017년 말 아내 엄춘옥씨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폐가로 남아있던 마을회관 바로 옆 비탈길 터를 닦고 새집을 지어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사를 마쳤죠. 어린 시절 같이 마을에서 뛰어 놀던 김관형(65)씨도 아내 최준식(61)씨와 함께 이사했습니다.

“여기가 태어난 동네야. 초등학교 때 근처 시장 쪽으로 이사를 갔다가 공고를 나와 서울에 가서 직장생활을 했지. 시험을 봐서 쌍용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다니다가 사내결혼을 했고. 그러다 회사를 옮겨서 다시 내려왔는데 애들 교육 때문에 청주에서 계속 살다가 왔지.”

관지미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바로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부터였습니다. 우선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이’ 방치됐던 마을 정중앙 터에 예쁜 새집들이 생긴 것만으로도 큰 안정감을 줍니다. 물론, 그저 거기에 그쳤다면 유주영 이장님이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그토록 좋아하지는 않았겠죠. 주민들은 새로 전입한 두 가구를 매개로 다시금 돈독함이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가 지은 집에는 일반 가정의 부엌뿐만 아니라 커다란 솥단지와 배수가 가능한 바닥을 갖춘 특별한 주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김씨는 ‘농촌에서 산다면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사람들을 대접하고 어울릴 수 있도록 테라스도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들어오기 전부터 집에 신경을 쓴 덕에, 두 집엔 주말이면 늘 친구나 손님이 찾아와 마을에 활기를 더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정을 나누는 것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들어오면서 마을회관이 정말 활성됐어. 동네 분들이 엄청 좋아하셔. 툭하면 같이 경로당에서 밥 먹으니까. 올 여름엔 백숙을 몇 번을 했는지 몰라. 어제도 노인회장님이 생신이라고 해서, 동네 사람 다함께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왔어요. 얼마나 좋아. 그런 게 농촌에서 사는 거라고.”

“종종 안 드셔 본 것들도 있어서 또 좀 더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오리불고기가 뭐냐’ 이러시고.”

부녀회장을 맡은 아내 엄춘옥씨는 마을의 화합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진천 남쪽의 오창산업단지 내 기상청 센터에서 ‘주방총괄’을 맡고 있는 엄씨는 마을에서도 종종 특별한 날이 올 때면 맛있는 식사자리를 기획합니다. 농촌에 와서 생긴 마음의 여유, 작정하고 집을 지어 갖춰진 여건, 또 이를 반기고 깊이 환영한 마을 어르신들까지 삼박자가 다 맞아 들어간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처음 이 같은 삶을 계획할 땐 의구심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엄씨 역시 강원도 농촌 출신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농촌의 이모저모를 잘 알고 있기에 다시 들어가 살고 싶다는 남편의 결정이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돌아와서 집 짓고 사는 게)남자들은 ‘로망’이라고 하지만 여자들은 또 안 그렇잖아요. 결국 들어오기까지 3년 걸렸어요. 애들이 나이가 다 찼는데(30대 중반) 결혼은 안했어요. 그래도 둘 다 큰 회사에 다니면서 앞가림을 한 지 오래니 경제적으로 별 문제는 없겠다 싶었죠. 저도 농촌의 딸이고 농부의 딸이라 ‘완전히 싫다’는 아니었지만 시댁 동네니까, 또 남편이 맏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여자들은 싫어할 수밖에 없잖아요.”

“도시가 정이 없다, 하지만 옆 사람에 관심 없으니 편하잖아요. 시골은 정이라고 하지만 그게 여자들은 불편하죠. ‘여자가 차를 끌고 어디를 가더라’, ‘퇴근이 늦으면 저 집 며느리는 왜 이렇게 늦게 오나’ 수군대고. 농촌이라면 그럴 것 같아서 처음에는 안 오고 싶었어요. 하지만 남자들은 생판 모르는데 가면 적응을 못하잖아요. 터를 닦아놨대요. 결국 와봤더니 경관이 너무 좋은 거 있죠. 시야가 뻥 뚫린 게.”

고향으로 돌아와 새집을 짓고 사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던 김씨는 물론이고, 엄씨도 들어오기 전 했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도시에서보다 나아진 삶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친척과 동창이 다 모여 있는 진천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너무 쏘다니진 않을까 하는, 사소하지만 무거운(?) 걱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기우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의 친구들은 주로 집으로 와서 어울렸고, 부부는 매일 저녁 늘어난 여유 덕에 대화가 늘었습니다. 어르신들도 마을에 에너지를 쏟는 부부를 진심으로 환대하고 높여줬습니다.

“(도시에서는) 뭔지 모르게 바빴다고 할까? 여기서는 기껏 퇴근해서 저녁까지 먹어도 시계를 보면 8시도 안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둘이 대화도 늘었어요. 비 오는 날이면 탁 트인 마당 보면서 커피 한 잔만 먹어도 그렇게 좋아요. 경로당에 가면 어르신들 다독여주시는 것도 너무 좋고요. 청주에 있던 친구들이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할 정도로 퇴근하면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해요.”

“어느 날은 퇴근해서 오면 알타리가 있고, 호박이 있고. 노인 양반들이 텃밭이 다 있으니까 항상 먹을거리가 넘쳐나. 그럼 우리는 젊으니까 몸으로 일해서 보답하는 거야.”

부녀회장이 된 엄춘옥씨는 종종 마을회관으로 어르신들을 불러모아 음식을 대접합니다. 부부는 "자신들처럼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계속 들어와야 농촌 만의 이런 모습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 9월 28일, 마을 회관에서 토요일 점심으로 닭백숙을 준비하는 엄춘옥씨. 귀촌하자마자 부녀회장이 된 엄씨는 종종 마을회관으로 어르신들을 불러모아 특별한 식사를 대접합니다. 부부는 "자신들처럼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계속 들어와야 농촌 만의 이런 모습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전원생활에 흥미가 있고 여유로운 삶을 꿈꾼다면 귀촌은 좋은 선택이 될 거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라면, 일자리를 구하지 않은 채 무작정 내려오는 것은 꽤 고민해봐야 할 일이라고도 덧붙입니다.

“은퇴하지 않고 여전히 일을 하면서도 이런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이 행복의 핵심인 것 같아요. 나이 예순쯤 먹고 ‘아무래도 좋다’하고 내려오면 이래저래 좋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아직 한창일 나이거든요. 직장 그만두면 간다는 사람들 있는데 힘들어요. 시골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어렵지만 만약 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내려오지 않는 게 나아요.”

청주에 있을 때보다 직장에 가는 길이 훨씬 멀어졌지만 대신 남편의 직장이 매우 가까이 있고, 덕분에 네 살 연상인 남편이 일할 수 있는 세월은 조금 더 길어질 것입니다. 부부는 아파트를 벗어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뭔가를 느낀 친구들이 많았다며, 관지미를 위협하는 산업단지 소식만 없었다면 아직 남아 있는 집터에 최소 한두 집은 더 들어오려 했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부부는 늘 마을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지만, 허나 자신들보다도 더 젊은, 은퇴를 앞둔 세대가 아닌 젊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며 아쉬움도 덧붙였죠.

“여기서는 애들 교육이 안돼요. 직장이 여기에 있어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도시 살면서 출퇴근을 해. 공장을 지어도 살려고 하는 사람을 밖으로 안 나가게 할 생각을 해야지. 그냥 원룸만 죽 늘어세우는 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땅도 좋고 넓은데, 마을을 만들고 살릴 생각을 해야지. 이건 인구가 늘어도 느는 게 아니에요.”

부부는 그래도 아직 젊습니다. 우선은 토건사업의 마수에서 마을을 지켜내는 것만 신경 쓸 생각입니다. 틈만 나면 어르신들을 살뜰히 챙기는 노고는 말할 것도 없고, 산업단지를 막기 위해 열심히 이장님을 따라 농식품부도 방문하고 군수님도 만나 할 말을 해봅니다.

“뉴스를 보니 10년 사이 서울하고 인천 합친 것만큼 없어졌다는데, 여기만 봐도 맞는 말이지. 시멘트를 뻘겋게 안 치는 데가 없으니 나중에 어쩔 거냐 이거지. 먹거리는 점점 사다 먹는데, 그쪽에서 안 팔면 어떻게 할 거야. 농지는 다 없애 놓고. 우리 나이 60 좀 넘었는데 그렇게 오래 살겠어? 그렇지만 남은 시간 동안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을 들어와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래야 이 문제들이 해결이 되지.”

“나는 제일 걱정이, 마을이 없어져서 이주를 한다고 쳐요. 대부분 나이가 많은데 그분들이 땅값 요만큼 받고 아파트 같은데 가서 못사시거든요. 그래도 눈뜨면 앞에 나가서 새싹이라도 나는 거 보셔야 되는데…. 못 사세요. (사람을 죽이는 거지. 몇 년 못 사실 거야.) 그 사람들의 기본권을 왜 유린하느냐 이거에요. 이 사람들의 직업이잖아요. 우리 같은 직장인의 직장을 뺏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똑같은 것 아닐까요.”

먼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득에 이끌려 녹지를 자꾸 없애려하는 시대는 이제 보내야 한다는 김씨의 마음가짐, 그리고 어르신들의 남은 나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엄씨의 심성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두 가구가 이주를 마치자마자 산업단지 사업계획이 발표된 것은 참으로 운이 나쁘다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부부의 각오를 들어보니 이는 아마 관지미를 지키기 위해 부여받은 숙명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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