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링·타파·미탁, 장마에 우박까지 … 제주 밭작물 초토화

무·당근·양배추·감자 … 지역·품목 불문 피해 심각
재파·3파·4파까지 … 부질없이 비용만 이중 삼중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망연자실한 제주 농민들

  • 입력 2019.10.13 18:00
  • 수정 2019.10.14 10:06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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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지난 7일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의 한 무밭에서 김승규씨가 태풍에 초토화된 무밭을 돌아보며 담배를 피고 있다. 김씨는 “2미터가 넘도록 배수로를 팠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했다. 한승호 기자
지난 7일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의 한 무밭에서 김승규씨가 태풍에 초토화된 무밭을 돌아보며 담배를 피고 있다. 김씨는 “2미터가 넘도록 배수로를 팠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했다. 한승호 기자

세 차례 태풍이 쓸고 간 지난 7일 제주의 들녘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한창 작물이 커가고 있어야 할 밭은 절반이 맨땅에 가까웠고 그나마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밭들도 작물이 겨우 연명을 하고 있을 뿐 정상적인 생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8월 말부터 쭉 이어진 장마는 작물들의 세를 약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수차례 강풍이 불어닥치자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해안지역은 조풍으로 인한 해수 피해도 상당하며 최근 일부 산간지역엔 우박까지 퍼부었다.

최소한 손가락 굵기만큼은 커 있어야 할 시기지만 밭에서 갓 뽑은 무·당근은 실뿌리에 이파리 두어 개를 힘겹게 달고 있었다. 뿌리 윗부분이 파래지는 청수현상까지 두드러져 요행히 출하가 가능하다 할지라도 상품성은 포기해야 할 지경이다. 특히 줄기가 제법 높이 올라왔던 감자는 바람에 꺾여 거의 100% 폐작 상황이다.

제주시 구좌읍의 한 감자밭에서 김두식씨가 비바람에 꺾여 하얗게 변해버린 감자 줄기를 살펴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제주시 구좌읍의 한 감자밭에서 김두식씨가 비바람에 꺾여 하얗게 변해버린 감자 줄기를 살펴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재해가 수차례에 나눠 왔던 만큼 농민들은 재파에 재파를 거듭해야 했다. 제주지역 거의 모든 밭이 재파·3파한 상태고 4파까지 진행한 밭도 드물지 않다. 종자값과 비료·농약값이 벌써 이중 삼중으로 들었지만 이번 태풍 ‘미탁’으로 다시 적잖은 밭이 뒤엎어졌다. 역경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이 연거푸 물거품이 되다 보니 대다수 농민들이 농사 의욕 자체를 잃어버린 상황이다.

구좌읍에서 당근·무·감자를 재배하는 김두식씨는 “30년 농사를 지으면서 올해처럼 크고 작은 태풍이 7~8개씩 온 적도 없고, 한 달 새 태풍 3개가 온 적도 없고, 가을에 45일 동안 비가 온 것도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르며 “처음 한두 번 피해 땐 농민들이 다들 떠들썩했지만 이젠 지쳐서 아무 말도 없고 그저 망연자실하다”고 말했다.

정식을 하는 양배추는 한 밭에 부분피해를 입은 경우 그나마 보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재파와 마찬가지로 보식 또한 심어놓으면 쓸려나가는 부질없는 상황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더욱이 양채류 산지인 제주 서부지역은 동부와 달리 이제 재파할 수 있는 품목도 전혀 없는 실정이다.

한림읍 양배추농가 김순덕씨는 “작물이 맨날맨날 죽어간다. 남아있는 것들도 뿌리가 없어 살아있다고 볼 수가 없다. 여태껏 보식하고 비료·농약을 더 쓰며 살려보려고 했지만 이번 태풍(미탁) 이후 결국 휴경하기로 했다. 1,000평당 300만원은 들였고 밭세(농지임차료)만도 100만원인데, 이것(양배추밭)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온다”며 가슴을 쳤다.

제주시 한림읍의 한 양배추밭에서 김순덕씨가 태풍에 유실된 양배추를 가리키며 울상짓고 있다. 한승호 기자
제주시 한림읍의 한 양배추밭에서 김순덕씨가 태풍에 유실된 양배추를 가리키며 울상짓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원 많이 한다지만 … 농가 실익은 제한적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원희룡)는 장마·태풍 피해가 중첩됨에 따라 몇 가지 지원책을 마련했다. 농약대·대파비 지원과 더불어 휴경할 경우 보상비를 지급하고, 영농안정을 위해 무이자 및 저리융자를 지원한다는 게 골자다. 재난수준으로 선제적 지원을 한다 설명하고 있지만, 막상 현장에 전해지는 실익은 크지 않다.

성산읍 월동무 농가 한철남씨는 7일 오전 읍사무소에 들러 태풍 ‘미탁’으로 전파된 무밭에 대파비를 신청하려다가 접수 자체를 거절당했다. 지난 태풍 ‘타파’ 피해 이후 작물을 살려보고자 농약대를 신청한 바가 있어 대파비 중복지원이 불가하다는 이유였다. ‘타파’에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를 입고 ‘미탁’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정작 ‘미탁’ 피해는 보상받을 길이 없어진 것이다.

한씨는 “1,000평 기준 농약대는 50만원, 대파비는 100만원쯤 한다. 농약대를 받은 적이 있어서 지원이 안된다면 농약대 50만원을 빼고 나머지라도 대파비로 지원해줘야지 이건 말이 안되는 것 아니냐”며 분개했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간 이후 월동무가 힘겹게 땅에 붙어있는 제주 성산읍의 한 무밭. 한승호 기자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간 이후 월동무가 힘겹게 땅에 붙어있는 제주 성산읍의 한 무밭. 한승호 기자

이번에 처음으로 시행한 휴경보상제는 그나마 일각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거의 모든 작목의 파종기가 끝난 터라 현 시기 재파가 가능한 몇 가지 품목에 재배가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보상액수는 결코 넉넉지 않다. 대표적 품목을 살펴보면 ha당 무 310만원, 당근 360만원, 양배추 370만원, 콩 130만원, 마늘 860만원 정도다. 양채류 농사를 짓는 김창준 전농 제주도연맹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투입한 종자값만 해도 1,000만원은 되는 게 현실이다. 땜질이나 생색내기가 아니라 농민들 생각을 해줘야 하는데 300만원대 보상은 턱도 없는 액수”라고 지적했다.

농작물 재해보험도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피해가 심한 감자의 경우 보험료가 무·당근보다 4배가량 높아 가입률 자체가 저조하며, 적채·비트·콜리플라워 등 서부지역 농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소 양채류는 아예 보험 가입대상이 아니다. 보험에 가입했다 하더라도 최초 1회 피해만 보상받을 있을 뿐 올해처럼 삼중 사중의 피해엔 무용지물이다.

한철남씨는 “대파비도, 보험금도 제대로 못 받고 ‘미탁’ 이후 추가 휴경보상 여부도 불투명해 남은 작물을 어떡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도에서 대대적으로 지원을 발표하고 언론에서도 크게 지원해줄 것처럼 보도하지만 우리한테 돌아오는 건 별로 없다. 융자지원 역시 결국 다 빚으로 남게 된다”고 착잡해했다.

태풍과 폭우에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제주 구좌읍의 당근밭. 한승호 기자
태풍과 폭우에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제주 구좌읍의 당근밭. 한승호 기자
태풍 미탁이 쓸고간 제주 성산읍의 한 밭에서 농민들이 월동무를 새로 파종하고 있다. 월동무 파종기도 이미 훌쩍 지났지만 겨울이 평년 이상 따뜻하길 빌며 도박 같은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파종으로 무려 4파째 진행이다.
태풍 미탁이 쓸고간 제주 성산읍의 한 밭에서 농민들이 월동무를 새로 파종하고 있다. 월동무 파종기도 이미 훌쩍 지났지만 겨울이 평년 이상 따뜻하길 빌며 도박 같은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파종이 무려 4파째다.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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