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패러다임의 전환과 농업 현실

  • 입력 2019.10.06 19:31
  • 기자명 윤병선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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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선 건국대 교수
윤병선 건국대 교수

참으로 민망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검찰개혁을 위해 시작된 일련의 상황들이 나라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이 어디일지 도대체 예측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태풍과 역병에 맞서고 있는 농민들의 마음은 더욱 착잡하다.

“내가 백남기고, 우리가 백남기다”며 분노해 일어선 많은 시민과 농민들의 힘으로 세워진 문재인정부의 농정에 농민들의 신뢰는 무너지고, 시위에 ‘상여’까지 등장했다. 문재인정부 들어서서 처음 등장한 상여라고 한다. 그리고 여성 농민들은 청와대 앞에서 호미를 들고 농업을 살려내라는 구조신호를 보냈다. 국가 농정의 기본 틀을 바꿔서 사람 중심의 농정개혁을 약속했던 정부였기에 많은 농민은 이전 정부와는 다른 더 나아진 새로운 정책들을 기대했고, 그러한 정책들은 농정의 기본 틀을 바꾸겠다는 공약이 있었기에 더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농정패러다임의 전환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당장 농산물 수급문제에서부터 일그러지다 보니 농정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는 것에서부터 실패했다. 2018년 농정개혁위원회 전국 순회공청회에서 많은 농민이 제기했던 신뢰할 수 있는 농정에 대한 바람은 농산물가격 폭락이라는 유탄으로 돌아왔다. 더욱이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개도국 지위 포기를 요구하는 엄중한 상황이지만, 집권 여당이 최근 개최한 ‘정책 페스티벌’에서는 18개 주제의 정책토론회에서 농업분야 주제가 별도로 나오지도 않았다.

농정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거창한 구도도 중요하지만, 이를 핑계삼아 현재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방치하는 구실로 삼아서는 안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보기 좋은 청사진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큰 구도를 만드는 것이어야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산물가격의 안정을 기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곡물자급률이 24%수준에 불과한 상황에서 노지채소를 중심으로 가격폭락이 심화되고 있는 현상을 극복할 방법을 시급히 찾아야 한다. 그간의 한국 농정에서 5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진행된 복합영농 포기, 주산지육성사업은 마늘, 양파, 고추 등 주요 채소류의 단작 확대로 귀결되었다. 정부의 지원정책도 개별작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면서 지역별 품목별 집중화가 심화하였다. 양파를 ‘다마내기’에 빗대어 ‘망아내기’, ‘흥아내기’라고 말할 정도도 농업생산의 투기화가 진행되었다.

문제는 지역별 품목별 집중화를 담아낼 수 있는 농민주도의 유통조직 활성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농산물 자체는 극복할 수 없는 유통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수확시기를 시장조건에 맞춰서 조절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농산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상 재고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이 과다하다. 이러한 이유로 농민들이 갖고 있는 시장에서의 교섭력은 매우 취약하기에 생산의 확대 못지 않게 건실한 유통조직의 육성이 필수적이지만, 그렇지를 못했고, 불행하게도 농협마저 이를 제대로 수행해 오지 못했다.

상품생산사회에서 “판매는 목숨을 건 비약”으로 표현되지만, 생산에만 목숨을 걸었던 결과다. 농민이 유통과정에서의 힘을 키워내는 정책을 등한시 해 왔다. 따라서 다양한 유통경로와 거래제도를 확보해 내도록 하는 것, 도매시장이 농민들이 경쟁하는 곳이 아닌 도매법인과 시장도매인들이 경쟁하는 구도로 만드는 것, 그래서 농민들이 더욱 유리한 경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농산물가격은 폭락했는데, 도매법인들의 잉여금이 급증하는 건 누가 보더라도 공정하지 못하다. 또한, 건실한 유통조직이 만들어져 있다손 치더라도 생산물량이 과다한 경우에는 시장에서의 가격폭락을 회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재 낮게 형성되는 농산물가격은 생산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농민들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농민은 시장에서 형성되는 낮은 가격을 개별적인 힘으로는 높일 수가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출하와 이로 인한 가격폭락, 소득감소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지역별 품목별 단작화를 완화시키는 대체작물 재배를 통한 곡물자급률의 향상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푸드플랜과 연계한 공공수매비축제도의 활용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적인 양파파동에도 불구하고 학교급식이나 공공급식, 군대급식 등과 연결된 지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해 반복되는 가격 불안정을 이용해서 소득을 올리려는 농민은 없고, 그럴 수 있는 농민도 없다. 가격등락을 기회로 투기적 이득을 누리려는 전근대적인 유통자본이 활개치는 구조를 개선하는 큰 그림이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정부는 농정에 대한 신뢰 확보에서부터 실패했다. 농정패러다임의 전환은 매우 큰 화두이지만, 당장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놓치면 결코 그 전환은 이뤄질 수 없다.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백남기농민 정신계승! 농정개혁쟁취!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한 2,500여명의 농민들이 문재인정부 농정에 사망을 선고하는 상여와 영정들을 앞세우고 국회의사당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문재인정부는 농정에 대한 신뢰 확보에서부터 실패했다. 농정패러다임의 전환은 매우 큰 화두이지만, 당장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놓치면 결코 그 전환은 이뤄질 수 없다.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백남기농민 정신계승! 농정개혁쟁취!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한 2,500여명의 농민들이 문재인정부 농정에 사망을 선고하는 상여와 영정들을 앞세우고 국회의사당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마음 놓고 농사지을 수 있는 농정패러다임은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농산물가격은 농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득기반이지만, 농민이 행하는 역할은 농업생산에만 있지 않다. 흔히 이야기하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떠나서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농민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소득뿐만 아니라, 사회적 격려와 지지를 바탕으로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시장가격에 생활이 흔들리지 않는 사회적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 농업과 농촌을 유지하는 주체인 농민에 대한 소득지지는 영농의 규모나 품목별 차이를 떠나서 공정하고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최근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공익형 직불제는 농정패러다임의 구축에 있어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익형 직불제의 확대가 기존의 다른 형태의 직불금 축소를 전제로 이루어지면 현장에서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지점이 강하게 존재하는 한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규모가 클수록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시스템은 지난 농정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고, 농민들은 이러한 농정에 나름의 합리적 적응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새로운 체계의 제도라 하더라도 기존 제도에 활용되었던 재원을 돌려서 쓴다면 이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구성원들의 갈등을 부추기는 아주 질 나쁜 정책으로 되어버린다. 따라서 직불금 예산문제는 농정예산 전반의 고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시설자금지원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보조금 사업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과 함께 농업예산구조의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져야만 공익형 직불제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제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농정패러다임 전환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은 한번 시행되면 변경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른바 ‘정책의 경로의존성’ 때문에 익숙한 방식의 정책을 선호하지 새로운 방식으로의 전환은 선호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으로의 농정전환을 통해서 구성원들이 자신을 얻으면 그것이 익숙한 경로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전환을 계속 실천해 내는 일이 중요하다.

현재 정부의 농업정책에서 농식품체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고민이 새로운 먹거리전략을 수립하여 실천하는 일로 진행되고 있다. 푸드플랜 구축사업이 그것인데, 현장에 가면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진행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사업의 껍데기만 바뀐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단순한 유통정책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민관의 협치를 바탕으로 한 지역민들의 참여, 특히 소규모 농가나 여성농, 고령농, 귀농자 등이 생산의 주체가 되고 지역민들이 중심이 된 조직, 사회적경제조직들과 함께 먹거리 선순환체계를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한 사례를 많이 접한다. 그동안 시설중심, 개별 경영체 중심의 보조사업에 익숙하다보니 연관된 지원사업이 네트워킹사업이나 주체발굴, 공유시설 지원 등을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조직의 시설확충예산쯤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의 주체들이 공동체성을 발휘해서 무언가 지역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부분들이나 개별적으로 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함께 고민하기보다는 밥그릇 챙기기에 몰두하는 볼썽사나운 모습도 보게 된다. 이런 현상은 우리네의 심성 탓으로 돌릴 사안이 전혀 아니라, 그동안의 농정이 만들어 놓은 결과다. 배려의 정신보다는 경쟁심만 북돋는 정책들에 익숙해 있다 보니 물 들어올 때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한 심성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아 버렸다.

대도시 소비지 시장,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경쟁하는 시장에만 익숙하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내 이웃을 먼저 챙기는 일은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학생 수가 적다는 핑계로 대도시의 학생들에게 보내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내 지역의 아이들부터 제대로 먹이자는 생각이 낯설 수도 있다. 이러한 익숙함과 이별하고, 낯섦과 친해지지 않고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모두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우리의 주위를 성찰해야 한다.

농산물가격, 농업소득, 농가소득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가격만을 쫓아가는 농업이 일상화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이다. 안정적인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소득의 확보, 생활의 안정을 기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다 보니 공익형 직불제나 푸드플랜이 화두로 또 오르게 되었다.

지역 내의 생산과 소비를 좀 더 고민하면, 특정 품목에 대한 집중의 문제도 서서히 해소될 수 있을 것이고, 지역에서 과잉생산된 부분이 존재한다면 이를 지역의 학교급식이나 공공급식에서 소비를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지역 급식 식재료를 공급하는 전진기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역의 농업과 먹거리문제를 지역의 주체들이 함께 고민하면, 그동안 우리에게서 멀어져 버린 공동체성의 회복에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매우 큰 화두이지만, 그 변화는 세세한 정책들에 대한 치밀한 얼개를 통해서 가능하기에 당장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놓치면 결코 그 전환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 농정에 대한 속시원한 돌직구, ‘농사직썰’을 매월 1회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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