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7회] 오보가 부른 만보산사건

  • 입력 2019.10.06 18:00
  • 수정 2019.10.13 16:0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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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산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호외판.
만보산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호외판.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오보는 1945년 12월 27일 자 동아일보 기사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동아일보는 내용을 완전히 반대로 전하는, 오보를 넘어 의도적인 왜곡이 의심되는 기사를 내보낸다. 기사 제목인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은 해방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소위 찬탁과 반탁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라를 분단시키기에 이른다. 그와 비교될 정도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오보 하나가 큰 사회적 사건을 일으킨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만보산사건’이다.

어찌 보면 언론에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사건이기도 했다. 일제가 의도했던 사건이며 그 배경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지배와 농민 수탈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일본인 대지주가 증가했지만 조선의 많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생활은 극도로 비참해졌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1927년 56만명 수준이던 만주의 조선인 수는 1936년 89만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만주로 간 농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고 낯선 이국땅에서의 삶 또한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농사에 기본이 되는 땅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1931년 여름에 발생한 만보산사건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만보산은 길림성 장춘현에 속한 지역으로 약 2만ha에 이르는 이 넓은 땅의 주인은 중국인이었다. 당시 중국인 지주는 직접 지대를 받지 않고 중간 단계를 거치는 방식을 취했다. 중개인이나 농업법인이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다시 임대를 하는 식이었다. 여기에 이주해 온 조선인 농민들이 대거 소작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들이 땅을 개간하고 논을 만드는 과정에서 현지 중국인 농민들과 충돌이 생겼고 군경이 동원되어 약간의 부상자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일제는 만주의 조선 농민을 대륙침략 정책에 이용하려 획책하고 있었다. 별다른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일본 관동군은 영사관 측을 이용하여 조선일보 장춘지국장 김이삼에게 만보산사건에 대한 과장된 허위 사실을 제공하여 본사로 타전하게 하였다.

중국인 상점을 습격하는 군중들.
중국인 상점을 습격하는 군중들.

김이삼은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기사를 보냈고 조선일보사에서는 7월 2일 자로 호외를 발행했다. 기사는 ‘중국 관민 800여 명과 우리 동포 200여 명이 충돌, 부상’이라는 제목 아래 마치 우리 농민들이 중국인들에게 큰 피해를 당했다는 식이었다. 숫자도, 내용도 모두 과장이고 조작된 것이었다. 이 호외를 근거로 동아일보, 경성일보 등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전국에 걸쳐 조선에 와 있던 중국인들, 즉 화교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천에서 중국인 음식점과 이발소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진남포 등 북쪽으로 번져나갔다. 화교들은 맞아 죽기도 하고 가옥이 불타는가 하면 재산을 약탈당하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의 옷을 입고 습격을 지휘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실제로 총독부는 화교들을 습격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고 그들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했다. 이때의 습격으로 화교들은 사망 127명, 부상자 393명, 재산 피해 250만 원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중국으로 돌아간 화교들을 통해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만주를 비롯해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거꾸로 중국인들이 우리 동포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오보가 나간 지 12일 만에 조선일보는 내용을 파악하여 일제가 사주한 허위보도임을 알렸지만 너무도 큰 피해가 난 후였다. 정정기사를 올린 김이삼은 누군가에 의해 다음날 피살되었다.

이후 사태의 수습을 위해 사회단체에서 화교들을 위한 위로금을 걷는가 하면 일제의 음모를 폭로하고 한중이 우호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만보산사건은 1930년대 만주를 중심으로 한중이 협력한 무력투쟁이 더욱 힘을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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