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82] 더 소중한 것

  • 입력 2019.09.29 18:00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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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9월 말은 원래 미니사과 알프스오토메를 수확하는 시기다. 지난해 영농일지를 꺼내보니 9월 21일 페이스북에 판매한다는 광고를 올렸다. 3년만의 첫 수확이고 무농약 인증을 받은 것이라 자랑하며 문자나 댓글로 주문해 주십사하는 내용이었다.

지인들과 제자들이 사줘 총생산량 500kg 중 상태가 괜찮은 것을 골라 200kg 정도 판매했었다. 1kg당 1만원씩 받았으니 총 200만원의 매출을 올렸었다. 적지만 내겐 큰 위로였다. 그래서 내년 4년차부터는 생산량도 톤 단위로 늘어날 것이고 매출액도 크게 오를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올해 4월 중순에 냉해를 받은 꽃이 말라 떨어지는 피해를 입으면서 산산조각 났다. 당시 우리 동네에 두 번 정도 서리가 왔다는데 난 그것조차 몰랐고 나중에 이웃들로부터 알게 됐다. 한 그루에 한두 개의 과일을 제외하고 거의 다 떨어졌다. 한해 농사를 4월 중순에 이미 망쳐버렸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한해 농사를 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웃 농민들께서는 ‘내년에는 괜찮겠지, 속고 사는 것이 농부의 삶이니 크게 개의치 말라’고 많은 위로를 해주셨다. 나는 농업소득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니 올해엔 소득이 없더라도 내년을 대비해 나무를 잘 돌보면 될 거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더위와 풀들이 기승을 부리는 7월과 8월 그리고 과일이 영글어야 하는 9월을 거치면서 봄에 다짐했던 초심은 점차 나태해졌다. 풀도 잘 베지 않았고 방제작업도 최소한 2주에 한번은 해야 하나 차일피일 미루다 적기를 놓치기도 했다. 보르도액을 살포할 때는 살포 후 최소한 3일 이상 비가 안 와야 하므로 방제시기를 놓치기 일쑤인데, 이마저 소홀해져 농작업이 제때 진행되지 못했다.

열매가 없으니 맛과 당도를 높이기 위해 바닷물을 희석해 뿌려주던 옆면 시비도 하지 않았고, 해초추출물 같은 무기 물질 살포도 하지 않았다. 열매도 없고 관리도 잘 하지 않아 나무들은 조기낙엽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고 고랑의 풀도 무성해 9월의 과수원은 보기에 산만하다.

금년에는 의기소침해지면서 전반적으로 과수원 관리에 관심이 줄고 소홀해진 내 자신을 발견했다. 사과를 팔아 소득을 올려야만 생활이 되는 것도 아니기에 처음에는 크게 개의치 않으려 했으나, 막상 열매가 없는 과수원을 정성껏 관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사실도 알게 됐다.

농사란 일단 노력의 결과물인 생산물이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원리를 깨닫는 한 해였다. 힘들게 농사지어 봤자 땀의 결실인 수확물이 없다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수확의 기쁨 없이 농사일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농부의 잘못이든 기후환경변화에 의한 천재지변이든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단순히 돈 몇 푼 더 벌고 못 벌고의 문제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내 노력의 결과물이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 허전함, 그리고 실망과 회의감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배우는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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